어촌 풍경>> 목포 다순구미 마을
어촌 풍경>> 목포 다순구미 마을
  • 김동우
  • 승인 2014.11.27 15:34
  • 호수 2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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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목포역에서 유달산으로 가는 언덕을 오른다. 짙은 먹구름이 머리 위에 내려 앉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유달산 공원 앞은 궂은 날씨에도 관광객들로 붐빈다. 전망대에 오르자 목포 시내의 스카이라인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돌리면 목포 앞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발아래로는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어촌마을을 만들어 낸다. 유달산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바다를 향해 흐르는 길을 따라 나선다.

길은 일제 강점기부터 ‘유곽촌’이었던 서산동으로 이어진다. 산비탈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마을풍경에선 옛정취가 물씬 풍긴다. 큰 길을 놔두고 서산동의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따닥따닥 붙어있는 가옥들 사이로 좁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다. 골목여행은 미로를 따라 출구를 찾아가는 놀이처럼 즐겁다. 손 때 묻은 명패와 대문들이 모두 제각각의 얼굴로 낯선 이방인을 반겨준다. 빼꼼하게 열린 문틈으로 주민들의 녹록치 않은 생활이 또 하루를 살아간다. 허름한 낚싯대와 손바닥만한 마당 한쪽에서 만개한 코스모스가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길은 서산동과 온금동을 나누는 아리랑고개를 너머 넓은 보리마당에서 잠시 쉬어간다. 보리마당은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보리를 탈곡해 넓은 이곳에 말렸다고 해 생긴 이름이다. 지명 하나에도 이곳의 팍팍했던 생활상이 묻어난다.

온금동은 ‘다순구미’(다순금)라고도 불렸는데 이 말은 햇살이 잘 드는 ‘양지바른’이란 뜻의 전라도 사투리다. 이름만큼이나 이곳의 삶도 넉넉하고 따뜻했으면 좋으련만….

다순구미의 골목은 이리 휘고 저리 휘다 언덕을 오르고 내린다. 골목 한쪽에는 구멍가게가 숨구멍을 열어 놓고 한가로이 언제 올지 모를 손님을 기다린다.

목포에서도 손꼽히는 달동네 다순구미는 목포가 시의 모습을 갖추기 전부터 어업인들이 어촌을 형성하고 생계를 꾸려가던 곳이었다. 살아 있는 어촌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과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 다순구미 주민들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다순구미가 사람들로 북적였을 당시에는 방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 때문에 한 집에 보통 서너 가구가 같이 살림을 차렸다. 다순구미의 가옥들 중 상당수가 작은 방 여러 개가 모인 형태인 이유다.

다순구미의 주민들 중 남자들은 거친 바다에서 고기를 낚고 아낙들은 그물손질과 생선운반을 담당하며 아이들을 기르고 살았다. 이렇다 보니 이 동네에선 ‘조금새끼’란 말이 전해진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사리 때 바다로 나가 며칠씩 조업을 하고 돌아온 어업인들은 다음 물때를 기다리며 아이를 만들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온금동에는 생일이 같은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을 ‘조금새끼’라고 불렀다.

다순구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오르자 형형색색의 슬레이트 지붕이 가파른 산비탈을 물들인다. 그 사이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조선내화공장(벽돌공장)이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넓은 대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 공장은 1938년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군수자본을 기반으로 설립돼 해방 후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벽돌 공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조선내화공장 앞은 ‘째보선창’이 있던 자리다. 째보선창은 앞쪽에 배를 댈 수 있는 조그마한 만(彎)을 부르던 말인데, 당시에는 삼 면을 막고 한 면만 열어놓은 모습이 언청이와 닮았다해 이렇게 불렸다.

목포시는 서산·온금지구를 주거형 뉴타운으로 만드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 다순구미의 지금 모습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까무룩 눈이 시려온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두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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