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업경영인은 우리 수산의 미래다
수산업경영인은 우리 수산의 미래다
  • 김병곤
  • 승인 2013.05.09 10:43
  • 호수 1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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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풍파랑(乘風破浪) 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거센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정진하다 보면 가슴속에 품은 뜻을 기필코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어업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고사성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떤 파고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근성과 뚝심, 그리고 끈끈한 ‘바다지킴이’로 자신을 지켜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어촌의 젊은 세력인 어업인후계자들에게 더욱더 잘 어울릴 듯 싶다. 뭍으로 향한 많은 꿈들을 접고 어촌과 바다를 지키며 대대손손 우리 어업을 존속시키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어업인후계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의 조직으로 정착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1981년 전두환 군사정권 당시 농어민후계자 육성사업에 어업인후계자들이 포함됐었다. 부정축재자 기부재산 중 395억원의 기금으로 농어촌지역 젊은이들을 지원하게 된 것이 출발점이다. 연리 5%, 3년 거치 4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농어민후계자에 대한 교육과 융자지원이 시작됐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기 이들 인원이 5만여명으로 늘어나면서 농어민후계자는 도, 시군, 읍면별로 다양한 모임을 구성했다. 이후 1987년 민주화로 정권 재창출의 위기에 봉착한 여당이 농어민후계자의 전국적 조직 구성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1987년 12월 9일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이와 궤적을 같이했던 어업인후계자들도 1989년 독자적인 행보에 나섰다. 창립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전국 시군대표자 회의를 통해 그해 12월15일에 창립총회(초대회장 이신복)를 갖고 ‘전국어민후계자협의회’로 닻을 올렸다.

그리고 2년 후 1991년 당시 농림수산부로부터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았다. 2001년에는 ‘어민후계자’를 마감하고 ‘수산업경영인’ 시대로 이행한 해였다.

이제 수산업경영인들은 자주적인 협동체로서 ‘한국수산업경영인중앙연합회’를 결성해 회원 상호간의 친목 도모는 물론 영어기술의 과학화, 경영의 합리화, 유통의 선진화, 어민의 권익신장에 일익을 담당해 오고 있다.

수협 민주화와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한수연 출신 수협조합장과 지방의원·단체장 등의 진출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현재 전국 92개 수협조합장 중 24명이 어업인후계자로 그 비율이 26%에 이르고 있다. 또 기초·광역의원 18명이 활동 중이며 기초단체장도 배출됐었다. 또한 이종구 수협중앙회장도 어업인후계자 출신으로 우리 수산을 이끌고 있다.

이같이 2만여명의 젊고 유능한 수산업경영인의 단결된 힘을 통해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늘날 한수연 조직의 위상과 정체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한수연은 스스로의 정체성과 나아갈 길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

질적 도약을 위해서는 현장 어업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 강력한 조직의 힘을 통해 관철시키는 새로운 어업인의 권리 찾기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또한 한수연 회원과 어업인이 주도하는 지방정치와 수산업의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내야 한다. 특히 협동운동과 지역조합 활성화를 위한 공통과제를 발굴하고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마련해 실천하고 수산업경영인을 대상으로 협동조합 교육도 강화해야 한다. 한수연이 얼마전 아홉 번째 전국대회를 열고 ‘블루오션 수산업, 국민과 함께’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제 해양수산부의 출범과 함께 한수연이 진일보해 우리 어촌 미래의 핵심세력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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