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50년을 투망하다⑥] 제주도의 해녀, 푸른 물결로 솟구쳐라
[바다 50년을 투망하다⑥] 제주도의 해녀, 푸른 물결로 솟구쳐라
  • 수협중앙회
  • 승인 2012.10.11 11:13
  • 호수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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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선 ㅣ 물질가는길(이형범)

홀연히 물살 당기며 이리저리 타고 노니
헤엄 배운 오리가 물속에 자맥질하는 듯
다만 바가지만 물 위에 둥둥 떴도다
문득 푸른 물결로 솟구쳐서
급히 허리에 맨 바가지 끈을 끌어올리고
일시에 긴파람으로 숨을 토해내니
그 소리 비장하게 움직여서 수궁 깊이 스민다
인생에 일을 하되 하필이면 이 일인가
그대는 다만 이(利)를 탐내 죽음도 무릅쓰는가

- 조선 정종 때 신광수가 지은 『석북집』 중에서


잠녀(潛女), 잠수(潛嫂)라고도 하는 해녀에 관한 최초의 공식기록은 1630년경 제주도를 다녀간 이건의 『제주풍토기』에 있다. ‘바다에서 미역을 캐는 여자’이면서 ‘부수적으로 생복을 잡아서 관아에 바치는 역을 담당하는 자’로 묘사된다.

해녀는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분포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해녀는 한반도 각 해안과 여러 섬에 흩어져 있지만 대부분 제주도에 몰려 있다. 해녀의 발상지 역시 제주도로 보이며, 그 기원은 자연발생적인 생업수단의 하나로 비롯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헤엄치기와 무자맥질을 배우다가 15~16세에 이르면 독립된 해녀가 되는데, 해녀생활은 대체로 60세 전후까지 이어진다.

해녀들은 대부분 농사일을 겸하고 있어서 물질만을 전업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농사일을 치르는 사이에 물때에 맞추어 바다로 나가 물질을 하므로 이들의 밭은 뭍과 바다에 걸쳐 있는 셈이다.

따라서 해녀들은 밭일과 물질을 한나절씩 치르는 경우가 흔하다. 해녀작업은 봄에서 가을까지 이어지고 특히, 한여름에 성행하지만 추운 겨울에도 물질을 하는 해녀들이 많다.

그들은 바다에서 무자맥질하여 보통 수심 5m에서 30초쯤 작업하다가 물 위에 뜨곤 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수심 20m까지 들어가 2분 이상 물 속에서 견디기도 한다.

해녀들이 숨죽이고 잠수하는 시간을 ‘물숨’이라고 한다. 호흡을 참다가 잠깐 해면으로 올라왔을 때 한동안 참았던 숨이 터지면서 나오는 ‘호오이’하는 소리가 이색적인데 이를 ‘숨비소리·’ 숨비질소리’ 또는 ‘솜비소리·솜비질소리’라 부른다.

이웃과 함께 바닷가에 나간 해녀들은 간편하게 마련된 탈의장이나 바위틈에서 ‘물옷’이라는 해녀복으로 갈아입고, ‘눈’이라고 하는 물안경을 낀다. 오늘날의 ‘왕눈’이라는 물안경은 1950년대부터 쓰기 시작하였고, 그 이전에는 ‘족세눈’이라는 쌍안경을 사용했다.

해녀들이 부력을 이용하여 가슴에 안고 헤엄치는 ‘테왁’ 밑에는 채취물을 담는 자루 모양의 ‘망시리’ 또는 ‘망사리’, ‘망아리’라고 하는 것이 달려 있다. 해녀들이 무자맥질할 때에는 이 ‘테왁’과 ‘망시리’를 물 위에 띄워둔다.

그 밖의 기구로는 전복 등을 캐는 길쭉한 쇠붙이인 ‘빗창’, 해조류를 베는 ‘정게호미’라는 낫과 조개 등을 캐는 쇠꼬챙이 갈퀴인 ‘갈고리’ 등과 물고기를 쏘아 잡는 ‘소살’이라는 작살이 있다.

나잠어장의 구조에 따라서 해녀작업에는 ‘갓물질’과 ‘뱃물질’이 있다. 해녀들이 떼 지어 헤엄쳐 나가서 물질하는 경우를 ‘갓물질’이라 하고, 15명 내외씩 배를 타고 나가서 치르는 작업을 ‘뱃물질’이라 한다.

그들은 마을 단위의 어촌계에 가입함으로써 공동체를 이루며, 또한 해녀회나 잠수회를 조직하여 해녀들의 입어시기, 공동채취, 입어관행 등을 자치적으로 결의하고 수행한다.

해녀들은 자기 고장에서만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방이나 외국으로 나가 몇 개월씩 출가생활을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해녀들을 출가해녀(出家海女)라 한다.

그들은 경상북도와 강원도를 거쳐 청진에 이르기까지 점점 동해안 일대를 누비며 북상했고, 남해안·서해안 및 울릉도·흑산도에 이르기까지 본토의 각 해안뿐만 아니라 객주의 인솔에 따라 일본 각지와 블라디보스토크, 요동반도의 다롄, 산둥성의 칭다오까지도 진출했다.

이들의 출가 이유는 본토의 각 연안이나 외국 바다에도 값이 비싼 해조류와 패류 등이 많았으나 이를 캘 해녀가 없으므로, 그곳에 가서 제주도에서보다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였다.

1920년대부터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일본 각처에 약 1,500명, 우리나라의 각 연안에 약 2,500명이 출가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광복 이후 출가는 우리나라의 각 연안에 국한되었고, 1960년대 초까지는 경상북도 구룡포·감포·양포 등 영일만 일대에만도 수천 명씩 집중적으로 나갔는데, 지금은 출가인원이 현저히 줄고 있다.

독립운동사에서도 해녀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어업조합이 발족하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자 1931년,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면 일대 해녀들이 9개 조항의 진정서를 도사(島司, 일제강점기 도지사의 감독하에 섬의 행정사무를 맡아보던 관직)에게 제출했다.

▲ 입선 ㅣ 작업(유인자)

하지만 반응이 없었고 이들의 불만은 1932년 1월 24일 구좌면 세화리 잠수사건으로 폭발했다. 도사가 이곳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1,000여 명이 세화리 주재소 앞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양손에 비창, 호미 등을 들고, 머리에 흰 물수건을 동여맨 채 길을 가로막고 항의를 시작했지만 도사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분노의 불길은 더욱 높아져급기야 관용차를 대파했으며, 결국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과 충돌하기에 이른다. 당시에 불리던 노랫말이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잠녀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어두우면 돌아와
어린 아기 젖 멕이멍 저녁밥 진자

하루 종일 해봤으나 번 것이 없어
살자 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최근에는 제주 해녀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해녀의 날’을 지정하는 등 해녀를 체계적으로 보존·전승하기 위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2011년 7월 7일 제주도가 마련한 제주 해녀문화세계화 5개년(2011∼2015년) 기본계획에 따르면, 해녀문화와 관련한 유·무형의 콘텐츠를 개발, 도내 6개 수협과 100개 어촌계, 해녀 가족, 도민, 관광객 등이 참여하는 해녀 축제를 개발한다.

축제에는 전남, 울릉도, 강원도 등 제주를 떠나 타향에서 생활하는 제주 출신 해녀와 일본 해녀 등을 초청, 국제적인 행사로 키울 계획이다.

또한 1단계로 2012년까지 해녀를 국가 비지정 무형유산 잠재목록에 등재하고,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제주도는 해녀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날을 ‘해녀의 날’로 지정할 방침이다.

참고문헌 : 주강현, 『관해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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