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협50주년 기념 어업인수기공모전 수상작(4)
수협50주년 기념 어업인수기공모전 수상작(4)
  • 수협중앙회
  • 승인 2012.06.21 15:32
  • 호수 1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상 수상자 최훈 作

엄마의 바다


당시 나는 이전의 시간을 추억할 기억조차 없는 한편, 부모의 품에서 세상모르는 어리광 부리면서 천진난만해야 할 고작 네 살이었다.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내 뇌리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그토록 큰소리로 울며 불러도, 눈 떠보라고 그렇게 애원해도 꼼짝 않으시던 주검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 난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바다는 내 아버지의 영혼을 삼키고 내 엄마의 애타는 오열을 삼키고 네 살, 다섯 살 남매의 이유 모르는 눈물마저 삼켰다. 아버지란 존재의 무게감이 무엇인지라도 알 수 있었다면 네 살의 나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 그토록 미쳐가는 엄마를 따라 실컷 후회 없는 통곡이라도 했을 것을 내가 아는 세상은 그저 네 살이었다.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하여서도 노래 부르며 씩씩하게 고향으로 돌아와 술과 함께 풍류를 즐기시던 유머가 뛰어나신 멋진 바다 사나이였다. 그 날도 머구리라는 특별한 기술자 아버지와 어선 위에서 펌프를 누르며 공기를 공급해주던 사람들은 평소처럼 작업에 임하셨지만 공기 연결 호스는 평상을 벗어나며 스크루에 감겨 끊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생명의 바다였던 그곳에 내 아버지는 자신의 생명을 묻으셨다. 전쟁터에서도 살아남으셨던 그 생명의 줄을 어떻게 그렇게 놓아버릴 수가 있었을까...

사고 어선이 허가 없는 불법어업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엄마는 꼭 살려야만 한다는 남편이 살아나지 않는데도, 어린 자식과 살아 갈 아무런 대책조차 없는데도 동네 사람이라는 이유로 요구 없는 합의를 하셨다.

그리고 엄마는 한 달 동안 문 밖 출입을 않으셨다. 침묵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엄마는 불현듯 까만 고무옷을 사셨다. 아버지의 주검이 어슴푸레 보이는 그 옷을 입고 어린 자식들과 죽지 않고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선택의 여지없는 해녀일을 시작하신 것이었다.

아버지의 주검이 내게 주었던 충격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었던 나는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새벽 바다에 나가시는 엄마 뒤를 따라갔다. 뒤 돌아보며 들어가라 손짓하는 엄마를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신고 있던 하얀 고무신을 손에 끼고 모래 위를 밀고 다니는 것 뿐이었지만 엄마를 지켜야하는 나의 절박함을 그렇게라도 밀어내야만 했다.

숱한 날을 모래사장에서 잠들고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아버지를 돌려주지 않는 것으로 더해지는 내 슬픔의 바다는 엄마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기다림이 되었다. 아직도 그 때의 그 끝이 없었던 기다림의 바다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네 살 아들의 긴 기다림은 두 양동이, 세 양동이 전복을 채취해 나오는 해녀들 속에서 한 양동이의 절반도 채워지지 않는 엄마의 초라한 양동이로 끝날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내가 한 살 나이를 더할 때마다 엄마의 나잠 실력도 늘어나 초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는 엄마가 잡아오는 성게를 늦은 밤까지 까야 할 때가 많아졌다.

성게 작업 하는 날은 왜 그리도 추운지 방 안에서 까는데도 겨울 세찬 바람은 허름한 담을 넘어 손끝을 얼리고 온 몸을 움츠리게 했다. 작은 내 손마저 성게 빛으로 물들고 온 집안이 성게의 특별한 냄새로 가득차도 살림이 좀 나아졌으면 추위쯤이야 뭐 별것이었을까.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어 면사무소에서 배급되는 밀가루가 주식이었던 시간이었다. 외할머니는 가끔 그때를 말씀하신다. “어린 새끼들과 밥이라도 제대로 먹는가 싶어 저녁밥이라도 지으려고 갔더니 쌀독에 쌀이라고는 흔적도 없다 아이가. 그 길로 집에 가 아침이라도 해 먹이려고 쌀 메고 바쁜 걸음으로 도착했더니 글쎄 세 식구가 멀건 물에 담긴 국수를 먹고 있다 아이가. 다시(육수) 낼 멸치가 없으니 국수만 삶아 맹물에 말아 먹었는기라...”

그 몰골로 스물다섯살에 과부가 된 큰 딸을 바라보는 외할머니 역시 아버지의 새파란 죽음이 안겨준 누구도 알 수 없는 가슴 깊은 ‘情’일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 시작된 3월 엄마는 먼 곳에 가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주위 사람들 얘기를 듣고 누나와 나를 외갓집에 맡기고 충청도로 떠나셨다. 다섯 살 많은 막내 외삼촌이 기사 아저씨께 부탁드려 중학교 가는 차편에 누나와 나를 초등학교에 내려주면 학교를 마친 후에는 둘이서 1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 외갓집으로 돌아왔다. 외할아버지와 식구들이 아무리 잘해 주어도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에 나는 늘 의기소침했다.

어느 날인가  TV에서 어떤 여자아이가 “아빠, 난 언제 어른이 되나요”하고 노래를 부르면 최불암 아빠가 얘기를 해주는 장면이 나왔다. 슬픈 마음과 내가 제일 갖고 싶은 아빠와의 다정함, 빨리 어른이 되어 이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상황이 일치되어 많이도 울었다. 하필이면 노래가 인기를 끌며 자주 나오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나는 어금니를 힘껏 깨물어도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외할머니가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라며 안아주시면 얼굴을 묻을 수 있어 한껏 울었다. 그래서 나는 그 노래를 정말 싫어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찢어지는 가난함으로, 엄마마저 곁에 없는 외로움으로 눈물은 이미 말라버려야 했고 더 이상의 눈물은 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마, 아버지를 맘껏 부르고 중학생이나 된 외삼촌이 부러워 나는 종종 괜한 투정을 부렸지만 외삼촌은 그런 나를 데리고 산에 나무도 하러 가고, 운동도 같이 해주고, 가끔은 야단도 치면서 정말 잘 보살펴 주셨다.

덕분에 꽃샘추위가 완전히 물러가고 산에만 가도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던 봄을 지나 여름 방학이 시작된 한 여름 엄마가 돌아오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침부터 큰 길에 나가 버스를 기다리며 지나가는 차를 한 대, 두 대 손꼽으며 기다리던 중 해가 뉘엇 기울 무렵 엄마를 태운 버스가 내 앞에 섰다. 같이 가셨던 한 분, 두 분이 짐 보따리와 선물보따리를 가득 안고 내리시는데 우리 엄마는 가실 때 입고 가셨던 겨울 스웨터를 그대로 입은 채 짐 보따리만 안고 내리셨다.

아마 돈이 아까워 한 푼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물어보지 않았는데 “덥긴한데 참을만하다”고 하신 엄마의 말씀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국수만 먹고 살 때도, 추위에 떨며 성게를 깔 때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내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게 된 출발점이었다. 빨리 돈 벌어 제일 먼저 울 엄마 이쁜 옷부터 사 줘야겠다고...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엄마는 누나와 내 손을 잡고 포항시내에 데려갔다. 시장에 가서 운동화를 한 켤레씩 사주셨는데 머리맡에 두고 밤새 잘 있나싶어 만져보느라 잠을 설쳤다. 자갈길에는 닳을까봐 벗어들고 맨발로 걸어 다니기도 하고 더럽혀질까 깨끗한 길만 찾아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물일에 익숙해진 엄마는 틈만 나면 어선들의 그물을 손질하는 일을 하셨다. 하루 종일 서서 해야 하고 무거운 그물을 올리고 내려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더구나 선원이 부족한 자리에 대신 조업 나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넘은 오로지 내 엄마만이 이어갈 수 있는 세월이었다.

엄마의 세월은 변하지 않고 그렇게 억지로라도 흘러 우리 남매는 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누나는 야간고등학교에, 나는 포항 시내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나’라도 대학에 보내야겠다는 엄마의 의지는 가난을 이겨 나가는 것만큼 강해 엄마의 바람대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기술고에 가려는 내 의지를 꺾고 엄마의 뜻을 따랐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대학에 가는 길은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었고 점점 기력이 쇠해지는 엄마를 더 고생시키는 죄도 그만 지어야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나는 엄마에게 이유 묻지 말고 30만원만 달라고 했다. 선뜻 돈을 주시는 엄마에게 아무 말 않고 중장비 학원에 등록하여 자격증을 따고 취업의 길로 들어섰다. 취업 후 엄마에게 말씀을 드리니 대학 나와야 사람처럼 산다며 어떻게라도 해볼테니 대학에 가라며 눈물 지으셨다. 내 인생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몸으로 때우며 살아온 당신과 같을까 노심초사 하셨던 것이다. 졸업식을 마치고 나는 악착같이 일했다. 몇 달을 쉬는 날 없이 야간작업까지 해도 불평 한 번 않았다. 내 엄마만 할까 싶었다.

엄마를 쉬게하려고 월급을 받아 단 한 푼도 손대지 않고 갖다드려도 엄마는 오히려 양어장 일까지 하셨다. 이제 그만 쉬시라고 했더니 “니가 한 달에 백만원만 벌어오면 당장 그만 둔다” 하시며 웃으셨다. 그리고 그 해 엄마는 처음으로 아버지 제사를 모셨다. 해마다 미안하고 죄송하다. 용서해 달라고 했는데 용서해 주실런가 모르겠다 하시더니 당신 아들이 이 만큼 자라 돈 벌어 와 제사 모시게 되었으니 이제 해마다 꼭 오셔야 한다 하셨다. 아버지 제사를 왜 안 지내느냐고 물어보는게 사치였던 가난이었음을 아버지도 잘 아시고 계셨을 것이다.

현장 경험이 수년간 쌓이는 동안 건설업이 호황을 누리며 나는 적지 않은 월급을 받게 되었고 여전한 엄마의 마구잡이 노동 대가까지 합해져 저축할 여유가 생기고 가끔은 엄마와 치킨을 사 먹어도 되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엄마가 집을 새로 지으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멍게 어장이 크게 성공하여 큰 돈을 번 이웃들의 새 집이 많이 생기고 난 후였지만 돈 걱정이 앞서 집을 지을 돈이 되겠냐고 되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푹 꺼진 옛날 집에서 평생을 사셨으니 얼마나 부러웠을까 싶어 우리도 이제 좋은 집에 살아보자며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새 집을 다 짓고 솥부터 걸어두어야 한다던 날 엄마와 나는 마당에서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지만 엄마는 지난 긴 시간을 돌이켜 보신 것 같았다. 어렵게 말씀을 꺼내셨다.

“니 아버지 죽었을 때 선주집에서 합의금이라고 육십만원을 주더라. 동네 술집에 아버지 외상 술 값 정리하니 오십만원이 남았는데 큰 아버지가 집안사람들과 의논하여 몽땅 감포 농협에 정기예금한다고 하더라. 내가 너거 놔두고 도망갈까봐 내한테 의논 한 번 없이 끝내 가져가시더라. 묵고 살 길이 없어 한 달을 꼬박 생각해도 막막하기만 했는데 고무옷 장사가 와서 해녀일 해 보라고 권하더라. 당장 옷 살 돈이 없다고 했더니 나중에 형편 될 때 갚으라며 외상으로 옷을 줬다.

니 아버지 형제도 못 믿는 나를 믿어준 사람한테 이런 날이 오면 내 분명히 은혜를 갚고 싶었는데 수 해전에 돌아가셔서 저승에서나 갚을 수 있을란가 모르겠다. 니 기억날란가 몰라도 비만 오면 집에 물이 새서 집에 있는 다라이(대야)는 다 꺼내야 했다. 큰 비 내리던 해 도저히 안 되어 니 큰아버지한테 그 돈 달라해서 지붕 수리 했더니 돈이 조금 모자라더라. 쌀 한 말 받고 니 앞으로 시내 작은 땅이나 집이라도 장만해두고 싶었던 그 돈이 그냥 지붕값이 되었는기라.

그래도 두세 군데는 물이 새었다. 워낙 오래된 집이니 고쳐서는 해결되는게 아니었겠지. 그 지붕 이제 허물고 이렇게 번듯한 집 지었으니 니 아버지도 이제야 편한 곳으로... 가실끼다. 그라고 니 아버지 첫 기일 때 큰 외삼촌이 니 아버지 좋아하는 탁주 들고 어린 니가 혼자 어째 제사를 모시겠노 싶어 왔었다. 흰 쌀밥 한 그릇도 없어 제사를 못 모신다는 걸 알고 들고 온 탁주를 혼자 벌컥벌컥 마시더니 눈시울을 붉히고 돌아가셨다.

그 후로 니 삼촌도 밥만 묵고 사는 형편에 아버지 기일날이면 해마다 외숙모가 음식 장만해서 같이 바다에 나가 어린 조카들 잘 지켜달라고 빌었다 하더라. 첫  기일 때 돌아가던 그 무거운 발걸음이 미안해서 처음 제사 모실 때 오라고 연락했더니 외숙모가 그제서야 그라더라. 니 외삼촌도 평생 배 타고 사는 사람인데 너거 걱정 앞세워 공을 그만큼 들였으니 부모 못지 않은것이제. 니가 잘 살면 외삼촌한테도 은혜 꼭 갚아야 한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엄마 믿고 이렇게 착하고 든든하게 자라줘서 정말로 고맙다...”

 나는 알고 있다.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한 집에 사는 행복, 끼니때마다 김이 모락이는 밥 먹는 행복, 엄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옷 고르는 일상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제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착한 사람의 남편이 되었고 열 살, 아홉 살 지혜롭고 건강한 남매의 아버지가 되었고 독립된 내 사업장을 가진 사장이 되었다.

엄마도 이제는 나이가 드셔서 다른 일들은 다 접으시고 나잠일만 하시면서 손주들을 봐 주신다. 나잠일이 예전만큼 있는 것도 아니여서 아주 가끔 전복, 성게, 해삼 등을 잡으시는데 우리 아이들은 할머니가 작업가신다고 하면 “할머니 전복 죽 먹고 싶다”하며 조른다.

작업한 날품과 전복을 바꿔 오시기도 하고 가끔은 전복을 사서 끓여주시기도 하시지만 매번 아이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너거는 먹고 싶은 것도 많다. 니 아버지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살았는데. 세상에 공짜가 어딨노. 아버지는 꼭 먹고 싶으면 할머니한테 돈 주고 사 먹는다. 니들은 오늘 착한일 꼭 한 가지씩 해야 한다.”

아이들이 할머니의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쯤에도 바다는 여전히 고난을 딛고 희망을 안겨주는 그 때의 푸르름과 같은 희망이 되고 꿈이 되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을 것을 오늘도 기대해 본다.       

<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