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역사를 뒤바꾼 물고기, ‘대구와 청어’
서구의 역사를 뒤바꾼 물고기, ‘대구와 청어’
  • 배석환
  • 승인 2020.08.26 19:07
  • 호수 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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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바다 웹진(wooribadawebzine.co.kr)

대구와 청어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식용 물고기다. 제철이 있다지만 한류성 어종인 대구와 청어는 사시사철 나오는 편이다. 이처럼 특별히 귀할 것 하나 없는 대구와 청어가 유럽 역사의 중심에서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고 기독교적 식문화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구와 청어, 기독교 식문화를 부흥시키다

성경에는 유독 물고기가 많이 등장한다. 다섯 개의 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대표적이다. 이와 유사한 기적은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마태복음’ 15장에서도 소개되는데 떡 7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4000명을 먹였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로마의 수도였던 라벤나(Ravenna)의 6세기경 그려진 최후의 만찬 모자이크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식탁 중심에 새겨져 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제자들 앞에서 육신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보이고 먹은 음식 또한 생선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육식에 반해 물고기는 기독교의 중요 식문화로 자리 잡아 빈번히 언급됐다.

그렇다면 어째서 물고기가 기독교 식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일까. 두 가지의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기독교적 관습에 따라 ‘육류’가 탐욕을 자극하는 ‘뜨거운 고기’로 규정되면서 엄격히 금기시 한 데에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행해졌던 사순절은 기독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 40일 동안은 예수의 고난을 함께한다는 의미로 저녁 식사를 제외하고 단식을 해야 했다. 

이러한 금욕주의를 바탕으로 탐욕을 상징하는 ‘뜨거운 피’를 육식은 자연스레 터부시 됐고 심지어는 육식을 엄격히 금지했던 금요일에 육식을 행할 경우 처형이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물고기는 육류와 달리 차가운 성질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금지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식문화는 종교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시대적·환경적 요인 또한 중요했다. 육류 소비는 제한적이었고 곡류와 과일은 사시사철 구하기 쉬운 식재료가 아니었다. 물론 여건에 따라 농작물을 키우기 힘든 환경도 있었다. 이에 반해 어류는 상대적으로 구하기 손쉬운 편해 속했다. 그중에서도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물고기는 다름 아닌 대구와 청어였다. 대구와 청어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각지의 식탁 위에 올랐다.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염장법과 같은 저장 방식이 발달하기도 했고 워낙 대량 포획이 가능한 어종이었던 터라 주식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했다. 특히 대구의 경우 질병과 추위에 강한 다산성 어종인데다 버릴 부위가 없을 정도로 이용 가치가 뛰어난 점도 한몫했다.

◆청어, 네덜란드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다

청어는 유럽에 증가하는 물고기 수요를 감당하고자 잡기 시작한 물고기였다. 기름기가 많아 쉽게 부패하는 것이 단점이었는데 내장을 제거하고 염장하는 보관 기술 및 방식이 발전함에 따라 다량 조업이 가능해졌다.

그러다 13세기경 독일 북부 뤼베크에 청어 떼가 몰려들며 큰 부흥기를 맞는다. 그야말로 횡재인 셈이었다. 유럽의 주요 식자재로 부상함에 따라 각지의 상인들이 청어 떼를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청어가 대량 서식하는 해안 인근은 자연스럽게 경제적인 부흥을 이뤘고 거대한 생선 수요와 함께 시장을 형성하며 복합적인 경제 체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막대한 이익을 얻기 위해 청어 무역 상인들은 동맹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한자동맹의 시초였다. 이렇게 형성된 한자동맹은 이후 200년 가까이 유럽 경제를 쥐고 흔들었다.

문제는 청어가 이동 경로를 변경하는 회유성(回遊性) 어종이라는 점에 있었다. 발트해에서 산란하던 청어가 15세기 초 기후변화로 북해로 향함에 따라 유럽의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자동맹은 자연스럽게 쇠락했고 반면 북해 인근에 위치해 있던 네덜란드가 청어 조업 및 가공 기술로 경제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 인구의 약 1/5가량이 청어잡이에 종사할 정도였다. 

이러한 수산업의 발전을 계기로 네덜란드는 조선업도 활발한 성장을 이뤄냈다. 더불어 연계적으로 화물선 및 운송업에 지대한 영향을 주면서 해운업도 점차 발전했고 그와 연관된 무역업 및 금융업도 덩달아 번영하게 된다. 오늘날 겨울철이면 즐겨 찾는 대구와 청어가 한 시대의 식문화를 책임지고 또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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