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고의 노력으로 일군 황금 굴밭 통영 ‘소고포 어촌계’
각고의 노력으로 일군 황금 굴밭 통영 ‘소고포 어촌계’
  • 배석환
  • 승인 2022.11.02 18:25
  • 호수 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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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바다는 지난 1963년 12월 대어민 지도를 목적으로 창간한 ‘어민’지(誌)가 그 시작이다. 이후 1975년 1월 ‘새어민’으로 1996년 5월 ‘우리바다’로 제호를 변경했다. 지난해 웹진으로 전환해 제564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어업in수산은 1975년 발행된 ‘새어민’부터 순차적으로 기사를 발췌해 최근 우리바다 기사와 비교함으로써 어촌·어업인의 변화된 생활상을 재조명한다.

•1978년

1978년 당시 소고포항 선착장
1978년 당시 소고포항 선착장
새어민 통권 123호에 실린 소고포어촌계
새어민 통권 123호에 실린 소고포어촌계
1978년 당시 소고포마을 전경
1978년 당시 소고포마을 전경

통영군 한산면 염호리 소고포 섬마을. 비록 44세대가 외롭게 사는 어촌이긴 하지만 풍요한 새어촌건설의 의욕에 불타는 어업인들의 노력으로 한산면에서 가장 가난했던 이 마을은 이제 가장 잘 사는 새어촌으로 탈바꿈됐다.

소고포 마을은 대대로 물려받은 찌든 가난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어촌이면서 고기잡는 어업인 한사람 없고 호당 0.4㏊밖에 되지 않는 영세한 농토뿐이고 이것도 타부락인의 소유가 2/5가 넘어 농토에 목숨을 걸고 봄철이 되면 식량이 떨어져 대여양곡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거나 풋보리를 베어 죽을 끓여먹고 살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당시 이 마을의 김호수 새마을 운동 지도자를 필두로 일부 마을주민들이 합심해 분연히 일어섰다. 얼마 안되는 전답에 의존해서는 누적된 가난을 벗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무한한 넓은 바다에서 살길을 찾기로 결심하고 굴양식에 착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무관심은 대단했다. 호응은 커녕 기술도 자본도 경험도 없이 어찌하느냐고 하나같이 고개를 돌렸다. 유리구를 바다에 띄워 돈을 번다니 꿈같은 애기라고 비웃기도 했다. 

김 지도자는 개인적으로 마련한 20만 원을 가지고 굴양식에 착수했다. 

그러나 첫 번의 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때마침 불어온 강풍으로 유리구 등 시설물을 파도가 완전히 삼켜버린 것이다. 이에 굴하지 않고 김 지도자는 정해원 어촌계장과 함께 종패를 구하고 불철주야 애쓴 덕에 두 번째는 대성공을 거뒀다. 40만 원을 투자해 80만 원의 소득을 올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주민들의 눈은 달라졌다. 노력하면 보람을 찾을 수 있다는 증거를 목격한 것이다. 주민들의 자진참여가 늘어갔다. 이에 선착장을 축조하고 호안공사를 벌이고 우물·빨래터 등 마을 공동사업과 지붕·담장·변소개량과 안길포장 등과 같은 환경개선사업을 밀고 나갔다.

굴양식도 호조를 보여 72년엔 10㏊의 굴밭에서 700만 원의 순익을 올렸다. 그러나 이듬해 남해안 일대 적조현상으로 굴양식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통영군수협에서 영어자금 60여 만원을 빌려 다시 힘을 모으고 땀을 흘려 드디어 협동의 꽃은 활짝피었고 이제 호당 소득은 253만 원이됐다. 가장 못살던 섬마을이 가장 잘살고 협동잘하는 새어촌으로 바뀌었다.
※ 기사참조 : 새어민 통권 123호(1978년 7월 발행)

•2022년

1978년에 비해 더 길어지고 넓어진 소고포항 선착장
1978년에 비해 더 길어지고 넓어진 소고포항 선착장
마을 가운데로 도로가 생긴 소고포 마을 전경
마을 가운데로 도로가 생긴 소고포 마을 전경
1972년 일궈진 굴 양식장은 여전히 그대로다
1972년 일궈진 굴 양식장은 여전히 그대로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뱃길로 30여 분을 달리면 만날 수 있는 한산도. 호국영웅 이순신장군의 혼이 서린 곳이다. 이 한산도 서편으로 발걸음을 향하면 소고포항이 나온다. 이 항을 기반으로 어업활동을 하고 있는 곳이 소고포어촌계다.

70년대 굴수하식 양식에 성공하면서 부를 축적한 소고포마을은 현재 20여 가구 정도가 정착해 살고 있다. 한때 40여 가구가 넘게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집 지을 공간이 부족해 산중턱에 나무를 자르고 집을 지었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마을 한가운데로 도로가 놓여 있어 마을버스가 운행중이며 80년대 지었던 마을회관은 수 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어촌계사무실과 함께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소고포항도 많은 변화를 이뤘다. 70년대 마을정비사업으로 완공됐던 선착장은 그 당시와 비교해 더욱 길어졌고 물때에 맞춰 높이가 달라지는 부유식 선착장으로 바뀌었다. 또한 채취한 굴을 선별할 수 있는 공장과 어촌계에서 사용하는 각종 어기구들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까지 갖춰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바뀌었다.

달라지지 않을 것이 있다면 여전한 굴양식이다. 물론 그 규모가 예전만 못하지만 소고포어촌계 7가구 정도가 7.9㏊ 바다에서 굴을 채취하고 있다. 바지락도 채취하고 멍게양식도 조금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어촌계원들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것은 굴이다.

김수동 소고포어촌계장은 “마을 초입에 갯벌이 있어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지락이 나기도 하지만 그 양이 급격히 줄어들어 고령의 어르신들이 소일거리 삼아 바지락을 캐는 것이 전부”라며 “과거부터 쭉 내려온 굴양식으로 마을이 유지되고 있는데 연간 수입이 3000만 원정도로 예전 같지 않아 젊은 세대들이 마을을 많이 떠났고 지금은 12명 정도가 바다에서 굴을 돌보고 있고 인력이 부족해 다른 마을에서 품앗이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고포항 앞으로 펼쳐진 바다에는 흰색 부표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대부분 굴수하식 양식장이다. 10월이면 올해 첫 굴을 수확하는데 이를 햇굴이라 한다. 양식장 마다 커다란 크레인이 바지선으로 불리는 무동력선위에 놓여져 있는데 굴이 부착된 로프를 감아 올리기 위해서다. 

굴 채취와 함께 새롭게 굴 종패를 입식하는 작업도 이맘때 이뤄진다. 하나의 메인 로프(아릿줄)에 부표 40개 정도를 메달고 부표 사이에 적당한 간격으로 굴 종패가 달린 줄을 메달면 된다. 종패는 가리비 껍질에 부착돼 있다. 줄 하나당 27개 가리비 껍질이 달려 있다.

새벽부터 시작된 굴 채취는 그리 오랜 시간 이어지지 않았다. 굴이 햇빛을 오래 받으면 품질이 나빠지기 때문에 채취하는데로 선별장소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굴 채취보다는 종패 입식이 더 고되고 힘들다. 바지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굴 종패를 바다에 넣으려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또한 바다에 부표를 설치하는 일이니 줄이 꼬이거나 선박 엔진에 걸리기라도 하면 작업을 중단하고 원상복구 시키는 것도 만만치 않다.

허리 필 시간도 없이 고된 작업에 바다를 외면하고 싶것만 김수동 어촌계장을 비롯해 소고포어촌계원들은 바다를 떠나지 못한다. 바람이 거세면 너나 할 것 없이 선착장으로 나와 흰 부표들을 한 참 바라보다 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야 발길을 돌린다는 말에서 굴양식은 생계를 책임지는 것을 넘어 가족임을 알 수 있다. 과거 부촌으로 만들어줬던 만큼은 아니더라도 무탈하게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소고포어촌계 모습이 이어지길 희망한다. 

굴 종패를 입식하고 있는 소고포 어업인들
굴 종패를 입식하고 있는 소고포 어업인들
굴 종패를 입식하고 있는 소고포 어업인들
굴 종패를 입식하고 있는 소고포 어업인들
굴 종패를 입식하고 있는 소고포 어업인들
굴 종패를 입식하고 있는 소고포 어업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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