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까지 고기잡이 나섰던 진짜 어업인들이 사는 곳 ‘거문도’
울릉도까지 고기잡이 나섰던 진짜 어업인들이 사는 곳 ‘거문도’
  • 배석환
  • 승인 2022.06.02 19:11
  • 호수 6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바다는 지난 1963년 12월 대어민 지도를 목적으로 창간한 ‘어민’지(誌)가 그 시작이다. 이후 1975년 1월 ‘새어민’으로 1996년 5월 ‘우리바다’로 제호를 변경했다. 지난해 웹진으로 전환해 제564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어업in수산은 1975년 발행된 ‘새어민’부터 순차적으로 기사를 발췌해 최근 우리바다 기사와 비교함으로써 어촌·어업인의 변화된 생활상을 매월 2회에 걸쳐 재조명한다.

■ 1997년

거문도란 섬 이름은 동도와 서도, 그리고 고도 등 세 개의 섬마을을 싸잡아 부르는 이름일 뿐 본래는 ‘삼도’, 혹은 ‘삼산도’라 불렸다. 이 중 가장 작은 섬인 고도가 통칭 거문도라 불리면서 삼산면의 행정·교통·경제의 중심지로서 맏형 노릇에 모자람이 없다. 

이 고도를 가운데 두고 서도는 북서쪽에 길게 누워있고 동도는 북쪽에서 동쪽 끝까지 바다를 가로막고 서있다. 이 때문에 먼 바다에서 몰려온 바람이 파도를 불러 일으켜도 서도·동도·고도가 감싸안고 있어 거문도 바다는 요동질 한 번 없이 평온해 어선들의 피난처로 제격이다. 또한 그 주변 바다는 갈치와 삼치, 고등어가 많이 잡히기로 이름난 말 그대로의 ‘황금어장’이기도 하다.

밭농사를 빼고는 땅에서의 소출이 넉넉하지 않아 대부분의 섬 사람들은 일찍이 바다에만 온 희망을 걸었고 거문도 경제권은 자연히 수산업이 틀어쥐게 됐다. 부지런함은 거문도 어업인들의 천명이자 재산이었다. 척박한 섬 생활일지언정 그네들은 자연스레 바다의 겉과 속을 깨달았고 어류들의 생리를 익혔으며 멀게는 물길을 따라 울릉도까지 고기잡이를 다닐 수 있었다.

4월 말부터 9월 말까지 질 좋은 새우를 잡아 그날로 위판을 거쳐 서울 등 대도시의 이렇다할 고급 음식점에 고가로 올리기도 하고 7월부터 11월까지 갈치를,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삼치를 잡아 거문도수협의 위판을 거쳐 뭍으로 내놓는다. 

새우, 삼치잡이도 재미가 쏠쏠하지만 진짜배기는 백도 앞바다에서 이뤄지는 갈치잡이라 하겠다. 8월 초쯤 거문도를 찾아온 여행객들은 거문도 부둣가의 그럴듯한 횟집에서 방금 썰어내 다시 바다로 되돌아갈 듯 싱싱한 갈치회와 갈치구이에 소주를 즐기며 아스라이 보이는 밤다에서의 갈치잡이 풍경을 구경거리로 삼는다. 

거문도 갈치잡이 채낚기 어업인들은 오후 서너시면 출어준비를 끝내고 거문도항을 벗어난다. 대게 저녁 7시쯤 집어등을 밝히고 곧바로 채낚기 바늘에 꽁치나 정어리 따위의 값싼 생선을 썰어 미끼로 매단다. 

5톤에서 10톤 쯤의 갈치잡이 어선에는 서너명의 선원들이 함께 승선하게 보통이다. 걸려든 갈치를 떼어내랴, 다시 미끼를 갈아 끼우고 낚시를 드리우랴, 거문도 갈치잡이 어업인들은 온밤 내내 그저 좁은 배위에서 선채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야 하니 여간 고된 게 아니다. 이렇게 잡아내는 갈치는 척당 평균 70~80㎏ 정도다. 찬바람이 불고 본격적인 성어기에 접어들면 180㎏ 쯤 잡아내는 것은 예사지만 적게 날 때는 값이 좋고 많이 날 때는 또 그대로 헐값이니 쥐는 돈은 큰 차이가 없다. 

※ 기사발췌 : 우리바다 제353호(1997년 9월 발행)

■ 2015년  

거문도는 쉽게 갈 수 없기에 꼭 한번 가봐야 하는 섬으로 여겨진다. 

여객터미널과 관공서 등 가장 많은 시설이 밀집해 있는 곳은 거문도 안에서 ‘고도’라 불리는 섬이다. 실제로 옛 문헌에는 고도만을 거문도라 부르기도 했다한다. 

하지만 과거 고도는 무인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곳이 영국군의 무단 점령으로 시작돼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시설을 확충해 마을을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 볼 수 있는 시설들이 남아있는데 유럽영화에서 보던 묘지가 조성된 공원은 1885년 거문도 사건 당시 영국군 수병중 사망한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졌다. 

본래는 아홉 기의 분묘가 있다고 했지만 현재는 세 기만 남아있다. 

고도와 서도를 이어주는 삼호교를 지나서 수월봉 등산로가 들려주는 빗소리의 하모니에 취하기를 한 시간 남짓. 저 멀리 하얀빛깔의 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파도가 심한 거문도 주변을 100여 년 넘게 비추며 아직도 그 자리에 우뚝 서있는 모습에서 거대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거문도에는 거문도 등대 이외도 녹산등대, 동도등대가 있다. 

그 중에서도 거문도등대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이유는 만들어진 배경도 있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풍광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기암절벽과 바위들이 바닷속까지 보이는 깨끗한 바다와 어우러진 모습이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조선시대 지리적 위치 때문에 열강들의 이해다툼 사이로 들어가 원치 않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거문도. 영국은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해야 했고 일본 또한 자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 또한 거문도를 눈여겨보게 되고 덩달아 청나라도 가세하면서 조선 정부에서도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모를 작은 섬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기에 이른다.

결국 아름다운 섬은 영국군이 러시아와의 해전을 준비하기 위해 고도 섬 전체를 요새화 했다. 당시 고도 섬은 무인도 였기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지만 영국기를 계양하고 군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막사를 짓는데 동원돼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힘없는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영국정부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사이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군과의 화합을 선택했다. 

이러는 와중에 뜻밖의 행운도 경험했다고 한다. 영국군이 상하이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통신선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보다 먼저 전화라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또한 다양한 서양문화도 받아들였다.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이 느슨해지자 영국군은 특별하게 훈련을 하지 않아도 돼 섬안에 테니스장과 당구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 기사발췌 : 우리바다 제526호(2015년 7~8월호)

■ 2022년

거문도수협은 1918년 전남 여수시 삼산면 일원을 지구로 어업조합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100여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백도와 거문도 등대, 인어공원 등 거문도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으며 남해의 청정바다에서 생산된 자연산 갈치와 삼치, 고등어를 위판하고 있다. 

또한 우럭, 참돔, 능성어, 감성돔 등 다양한 어류를 직접 계통 출하해 어업인 소득증대에 기여하고 있다.

거문도수협 관할 어촌계는 11개 어촌계가 있으며 어촌계원 수는 699명이다. 

지난해 위판실적은 1186톤이고 금액으로는 143억 4700만 원 가량이다. 올해 1분기의 경우 위판량은 242톤, 30억 원 정도다. 

올해 현재까지 가장 많은 위판 실적을 보인 어종은 갈치로 110톤이 위판장을 통해 전국으로 팔려나갔고 다음으로 새우 98톤, 삼치 90톤이 생산됐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