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낙도에도 숨가쁜 기지개 ‘비안도어촌계’
외로운 낙도에도 숨가쁜 기지개 ‘비안도어촌계’
  • 배석환
  • 승인 2021.10.13 19:19
  • 호수 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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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바다 다시보기 – 비안도어촌계

우리바다는 지난 1963년 12월 대어민 지도를 목적으로 창간 한 ‘어민’지(誌)가 그 시작이다. 이후 1975년 1월 ‘새어민’으로 1996년 5월 ‘우리바다’로 제호를 변경했다. 지난해 웹진으로 전환해 제564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어업in수산은 1996년 발행된 제334호부터 순차적으로 기사를 발췌해 최근 우리바다 기사와 비교함으로써 어촌·어업인의 변화된 생활상을 매월 2회에 걸쳐 재조명한다.

■ 1975년 비안도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에서 서북쪽 바다에 외로이 떠 있는 비안도는 기러기가 날고 있는 형상 같다고 해 비안도(飛雁島)라 불린다. 

군산서 뱃길로 60㎞, 직선거리로는 30㎞인 섬이지만 변산반도에서는 10㎞밖에 되지 않아 먼 거리를 돌아서 가야 하는 뱃길을 원망하는 것이 이 섬마을 사람들의 시름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것이 직선거리가 짧음에도 뱃길이 없어 다른 여덟군데 섬을 들르기 때문에 비안도 뱃손님들은 여기저기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고군산열도의 모든 섬을 훑어봐야 하고 모든 섬의 나루터에서 손님이 내리고 타는, 짐을 부리고 싣는 그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군산에서 비안도사이 뱃길은 실로 편도 7시간, 흑산도 보다 더 오랜 뱃길이다. 뱃길이 먼 만큼 배삯도 자연 엄청나게 물지 않을 수 없기에 비안도 사람들은 억울하기 짝이 없다. 

그 지루한 관광코스를 견뎌야하는 외에 관광료까지 톡톡히 물고 있다. 여객선으로 하루 낮동안 걸려 비안도에 오면 그 배는 비안도에서 잔다. 그리고 이튿날 낮동안 군산까지 간다. 또 폭풍이나 파도가 있으면 며칠을 쉬어야 한다. 

7시간의 뱃길에 시달린 눈으로 보는 비안도의 첫모습은 조는 듯 조용하다. 뱃고동소리에 초등학교 꼬마들이 몰리고 짐을 내리고 손님이 내린다. 남자들은 거의 전원이 바다로 나갔기 때문에 부둣가도 배 한 척 없이 텅비어 있다.

마을을 들어서면 방송국의 수신탑이 우뚝 솟아 있고 경찰관파출소가 자리한다. 다음으로 어촌계 사무실 겸 구판장이 눈을 끈다. 어느 마을에서도 보기 힘든 당당한 건물이다. 방파제도 길고 튼튼하다. 800m의 이 공사를 위해 마을에 배당된 모든 시멘트가 들어갔다. 자체자금과 취로사업용 양곡과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총력이 이 방파제에 기울여졌다.

방파제를 이룩한 여세로 공판장 계획을 세웠다. 어촌계장은 먼 군산까지 뱃길을 수십회 내왕한 끝에 군산어협으로부터 공판장건설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수협중앙회 새어촌건설자금과 어협의 특별융자 280만 원을 받아내기에 성공했다. 드디어 객주의 횡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초석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 몇 년 동안에 이 마을에도 어선만은 많이 늘었고 개량됐다. 5톤 2척, 3톤 2척, 2톤 미만 47척으로 동력선만도 44척이 됐다. 이는 4~5년 전 동력선 2척, 무동력선 12척에 비하면 눈부신 발전이다.

비안도는 양식적지를 가졌음에도 자금 문제로 인해 융자를 받지 못해 이를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비안도 연안에는 작년부터 노랑조개가 나기 시작했다. 어업인들이 부지런히 일만 하고 싶어한다면 앞으로는 이마을에서 어한기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노랑조개를 남녀 가림없이 동원도 잡아낸다면 1년내내 노는날이 없어지고 여기서 조개 가공공장까지 마련한다면 몇해안가 부자마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비안도가 낙원이 되는 청사진을 안고 비안도 지도자들은 오늘도 발돋움을 생각하고 새마을을 의논하고 있다.

※기사발췌 : 새어민 제5호(1975년 5월 발행)

■ 2015년 비안도

어촌계장을 따라 비안도 주민들이 ‘터진목’이라 불리는 곳으로 향한다. 아직 아침 7시 30분이지만 하루 종일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발걸음 속도가 남다르다. 하나라도 더 캐야 그 만큼 가격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소리 없는 경쟁인 셈이다.

축구장 크기만 한 땅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모래와 펄만 있어도 작업하기 손쉬울 텐데, 녹색의 이끼류가 끼어 있는 돌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 호미로 땅을 파기가 여간 녹록치 않다. 돌들을 걷어 내고 호미로 여기저기 긁기를 여러 차례 펄이 잔뜩 묻은 바지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실제로 같은 시간동안 작업을 해도 그 양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오랫동안 바지락을 캐왔던 배테랑 어촌계원들은 다른 이들 보다 2배정도 많이 캔다고 한다. 그래서 어족 보호 차원도 있고 위화감을 덜기 위해 캐는 양도 한사람 당 30kg으로 제한했다고 한다. 

한 여름 더위를 방불케 하는 햇살 아래 그것도 바다에서 허리 펴기도 힘든 바지락 작업은 인내가 반을 차지한다. 그러한 인내를 견뎌내면 나름의 쏠쏠한 재미를 본다고 한다. 한달에 15일정도 하루 4시간 바지락을 채취해 회원 1명당 평균 100만 원 이상의 소득을 올린다고 하니 말이다.

바지락 채취는 대부분 여성 어촌계원들의 몫이다. 물론 나르는 것은 남자들의 몫이다. 바지락 채취가 한창인 같은 시간 남성 회원들은 어구를 손질하고 어선을 수리한다. 특히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이 대나무 통발이다. 

하지만 대나무 통발은 불법이라고 한다. 비안도에서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통 방식이지만 등록되지 않은 방법이라는 이유만으로 해경의 단속 대상이 된다고 한다. 

바람이 많이 불지 않는데 어선들이 대부분 정박돼 있다. 사방이 바다이거늘 나가면 뭐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정박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꽃게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어업인에게 물어보니 바다에 나가면 적자를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고 이시기에 꽃게를 잡으러 서로 바다에 나가려 했는데 새만금 방조제가 들어선 것도 모자라 근처 선유도로 다리가 놓이면서 어장이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나마 김양식을 시작하면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적자를 메우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

비안도는 갯벌이 주는 매력과 모래사장의 시원함이 동시에 공존한다. 다시 말해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춘 섬 관광지인 셈이다. 군산시 앞바다에 존재하는 여러 섬들 중 아직 섬 마을 그대로의 모습을 갖춘 몇 안 되는 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비안도는 여름 피서철에도 좀 처럼 사람이 분비지 못한다고 한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로 여객선 운항이 중단 된지 13년이나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안도 주민들도 육지로 나가려면 개인 선박을 이용해야 한다. 배가 없는 주민의 경우는 여간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개인 선박도 10톤 이상의 큰 어선이 아닌지라 파고가 조금만 높아도 아슬아슬한 고개 운항을 해야 한다. 특히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아플때가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이와 더불어 어촌계회원들이 소유하고 있는 배들은 ‘유선 및 도선 사업법’에 의거해 개인 선박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일반인들을 태워 금전적 이득을 취하게 되면 처벌의 대상이 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군산시와 부안군의 힘겨루기가 결국 아무 이유도 모르고 바다를 터전으로 삶고 있는 비안도 주민들의 한을 키우고 있다. 하루 빨리 문제가 해결되길 기대해 본다.

※기사발췌 : 우리바다 제525호(2015년 5~6월호)

■ 2021년 비안도

새만금 방조제가 생기면서 사실상 육지와 지근거리에 있음에도 비안도행 뱃길은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아 비안도 마을주민들의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다행히 지난해 3월 여객선운행이 확정됐고 계절별로 그 운항 횟수가 달라지지만 정기적으로 뱃길이 열렸다. 현재 비안도를 기반으로 조업을 하고 있는 어선은 145척으로 이중 5톤 이상은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2척이다. 봄과 가을에는 꽃게와 주꾸미 등을 주로 어획하고 있으며 오징어도 주요 어종이다. 또한 바지락 채취로 어촌계원들이 부가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다.

특히 김양식업은 150여 명의 비안도어촌계원들에게 있어 주 수입원이다. 군산 앞바다는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양식에 최적화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어 양질의 물김을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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