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바다 - 소안도
다시보는 우리바다 - 소안도
  • 배석환
  • 승인 2021.03.31 19:41
  • 호수 5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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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외침이 들려오는 항일의 섬 ‘소안도’

우리바다는 지난 1963년 12월 대어민 지도를 목적으로 창간 한 ‘어민’이 그 시작이다. 이후 1975년 1월 ‘새어민’으로, 1996년 5월 ‘우리바다’로 제호를 변경했다. 지난해 웹진으로 전환해 제564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어업in수산은 1996년 발행된 제334호부터 순차적으로 기사를 발췌해 최근 우리바다 기사와 비교함으로써 어촌·어업인의 변화된 생활상을 매월 2회에 걸쳐 재조명한다.

당사도·횡간도·구도 등 세 개의 유인도와 이망태도 등 열 개의 무인도를 품에 안은 채 한 개의 면을 이루고 있는 완도군 소안면의 임자섬 소안도. 본디 이름인 ‘달목도’ 대신 소안도라는 오늘의 이름을 얻은 것은 1896년의 일이다.

역사에 최초로 기록된 것은 1684년이며 해남군에 이진진이 설치되면서 부터다. 국방의 임무만이 아닌 제주 내왕 업무도 관장함에 따라 이진에서 제주를 왕래할 때에는 소안도 월항리를 거쳐 오가도록 하였다고 한다. 즉 예부터 교역을 위해 제주를 향하는 이들의 중요한 기착지인 셈이다. 이러한 교통의 요충지는 문물의 발달이 빠르다. 그래서 소안도는 일찍 서양문물을 받아 들였고 1910년에는 자체적으로 학교를 세우는 등 문화적으로 번성했던 섬이라 한다.

소안도는 입도 때부터 일본과 ‘악연’이 깊은 섬마을이다. 지난 1592년 임진난을 피해 이섬을 찾은 이들은 달목마을 포구에 타고온 배의 닻줄을 묶어 놓고는 그 고단한 삶을 섬 곳곳에 비끄러맨 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악연은 일제암흑기에 절정을 이룬다. 

특히 당사도 등대 습격과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 불복건은 두고두고 이야기가 되고 있는데 소유권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 13년간 왜인들과 법정투쟁을 벌인 끝체 승소한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로 하여 송내호·정남국 같은 독립투사와 100여명의 선열들이 ‘연 투옥 햇수 110년’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항일정신의 밑바탕에는 교육의 힘이 컸다고 한다. 현재 사립소안학교 도서관이라 불리는 건물이 들어선 터가 과거 ‘중화학원’을 거쳐 ‘사립소안학교’로 이어져 내려 왔던 곳이기도 하다. 교육을 통해 나라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알았던 주민들은 독립자금 모금과 농민운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 69명의 독립운동가와 20명의 독립 유공자를 배출한 항일독립운동의 성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친일세력의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소안도의 노력은 오랜 세월 잊혀졌다가 1990년 소안도에 항일 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지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로소 태극기가 섬 곳곳에 펄럭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 맥반석 몽돌이 지천에

주변 보길도와 청산도에 비해 소안도의 자연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옛모습 그대로 온전히 보전돼있다. 특히 몽돌해수욕장이 일품이다. 미라해수욕장, 부상해수욕장 그리고 진산해수욕장 모두 몽돌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지역의 몽돌과 틀린 점은 아주 작은 크기의 조약돌이 해변에 깔려 있어 신발을 벗고 걸어도 그리 아프지 않다. 이곳 주민들은 이 돌을 맥반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미라리해수욕장을 맥반석 해수욕장으로 부르는데 몸에 좋다고 알려진 검은색의 맥반석이 지천에 깔려 있다. 

바다뿐 아니라 해변을 따라 늘어선 상록수림도 중요한 천연기념물이다. 맹선리 상록수림과 미라리 상록수림은 우리나라 최대 난대식물과 희귀종이 자라는 바다 숲이라 한다. 수령이 300년 전후로 추정되는 후박나무를 비롯한 245그루 상록수가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다.

섬 주변을 걷는 것도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지만 절대 빠져서는 안 될 코스가 가학산 등산로다. 정상까지 왕복 4시간 정도의 코스인데 사실 가학산 정상의 높이는 359미터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산세가 험하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면 몸이 고단하게 되는 산이다.

정상을 얼마 두지 않고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소안도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학운정에 잠시 앉아 시원한 냉수로 목을 축여 본다. 저 멀리 강진 마량항이 보이고 노화도와 구도를 잇는 연륙교 공사가 한창이다.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무런 막힘이 없이 탁틔인 남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학산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절경이다. 학운정에서는 북쪽의 남해바다만 볼 수 있었는데 이제 360도 모든 세상이 뇌리에 각인된다. 

◆ IMF 시대를 이겨낸 지금의 소안도 양식업

해조류 양식을 바다 생활의 근간으로 여겼던 마을 주민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해상가두리와 육상 수조식 어류양식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모험’으로 까지 불렸던 이 어류양식은 이제 온전한 효자 어업으로 한 자리를 든든히 차지하고 있다. 

나아가 몇몇 어업인들은 소안도 주변 바다 특성에 여러모로 적합한 비단가리비 양식으로도 고소득을 기대하고 있다. 중국산 치패를 들여와 양식에 나선지 2년이 지난 1998년 첫 수확이 이뤄졌다.

더불어 소안도에서 여전한 것은 김과 미역 등 해조류 양식이다. 언덕길에서 내려다보는 김·미역 등 해조류 양식장의 광활한 모습과 매일 아침 소안수협 앞에서 열리는 위판현장에서 확인된다. 

이렇듯 활발한 양식업 덕분에 IMF 당시 소안도 주민들은 큰 어려움 없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가리비 양식은 소안도에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위판량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어업인들이 가리비 양식이 아닌 전복양식으로 전환했다고 한다. 

다시마양식 또한 전복양식을 위한 먹이용으로 양식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섬 곳곳에 다시마 말리는 작업을 보는 것이 최근에는 힘들어졌다고 한다. 미역 또한 해안에 깔린 검은 자갈위에서 미역 건조를 하는 모습은 사라지고 일부 양식장만이 미역을 채취하고 있는 정도다. 

2021년 소안도 바다에서 주로 양식되고 있는 것은 김과 전복이다. 전체 양식장의 40% 정도가 김이며 60% 정도가 전복 양식장이 해도 무방하다. 그 이유는 다시마의 경우 전복 먹이로 길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안수협에 위판되고 있는 물김 현황을 살펴보면 2016년 위판량은 2만459톤, 위판고는 202억원 가량을 기록했다. 또한 2017년 2만8849톤, 377억원, 2018년 2만8127톤, 308억원, 2019년 3만2138톤, 296억원, 2020년 2만8681톤, 290억원으로 나타났다.

전복의 경우는 어촌계 자체적으로 판매를 하고 있어 정확한 생산량을 알 수 없지만 소안수협 관계자에 따르면 전복양식을 통해 어업인들이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 기사발췌 : 우리바다 제359호(1998년 3월호), 우리바다 제534호(2016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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