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바다’ - 피조개 양식
다시보는 ‘우리바다’ - 피조개 양식
  • 배석환
  • 승인 2021.03.17 20:21
  • 호수 5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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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벌이 일등공신 ‘피조개’

우리바다는 지난 1963년 12월 대어민 지도를 목적으로 창간 한 ‘어민’이 그 시작이다. 이후 1975년 1월 ‘새어민’으로, 1996년 5월 ‘우리바다’로 제호를 변경했다. 지난해 웹진으로 전환해 제564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어업in수산은 1996년 발행된 제334호부터 순차적으로 기사를 발췌해 최근 우리바다 기사와 비교함으로써 어촌·어업인의 변화된 생활상을 매월 2회에 걸쳐 재조명한다.


1997~1998년

우리나라 피조개 양식 붐이 일어난 것은 지난 80년대 초반 적지선정만 잘하면 수십배 장사가 된다는 덤 외에도 전량 일본으로 수출된다는 점 때문에 남해안 일대는 피조개밭으로 변모해갔다. 이러한 부흥기로 1985년 피조개양식수협이 설립됐을 정도다. 

진해만일대부터 고흥의 득량만까지 고루 분포한 피조개 양식장 중 진해만일대 지역 생산량이 전체 생산량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피조개가 가장 유명한 지역은 경남 진해시다. 진해시 피조개 양식어업인들이 1997년 생산한 피조개는 1만톤이 넘는 양으로 연간 440억원이나 되는 소득을 이 피조개로 거두어 들인다.

진해만은 그 연안수심이 3미터에서 50미터 정도이고 파도가 잔잔하며 조류의 유입이 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지질이 펄질이거나 모래와 펄이 적당이 혼합된 사니질로 이루어져 있어 피조개를 비롯해 새조개·개조개 등 패류 서식지로 그만이다.

피조개는 6월에서 10월 사이 산란을 하며 이때 진해만의 평균수온은 20℃ 정도로 피조개 산란 적수온과 일치한다. 진해 어업인이들이 본격적으로 피조개 양식에 나선 것은 지난 1977년 진해만에서 피조개 인공채묘가 성공을 거두면서부터 비롯됐다.

대부분 피조개 양식은 어촌계 공동사업으로 이루어지는데 진해시수협 관내에만 1117㏊ 피조개 양식장이 있고 이 양식장에서 해마다 평균 1㏊당 50만 마리의 피조개를 생산해 내고 있다. 보통 3월 말경부터 양식장 저질청소와 객토잡업까지 완전히 마무리 해놓고 거제·고성 남해 등지에서 구입해온 질 좋은 치패를 바다에 뿌리는 일로 피조개 1년 농사를 시작한다. 문제는 치패 가격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해거리 현상(1992년 이후 남해안 피조개 양식장 종패 채묘가 한 해는 제대로 되고 그 이듬 해는 채묘량이 극히 저조한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으로 지난해 1원이던 종패가 올해는 4원 70전에 거래되고 있으니 너무 큰 가격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피조개는 국내 소비보다 일본 수출량이 더 많다. 국내 소비량은 전체 생산량의 1~2% 정도에 불과하다. 값이 비싼 탓도 있지만 매년 되풀이 되는 패류독소에 관한 명확한 기준이 없어 해마다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반면 일본의 경우 회나 초밥의 재료로 각광을 받고 있어 진해만 피조개의 품질을 최고로 쳐준다고 한다. 

※ 우리바다 348호(1997년 4월호) 및 우리바다 359호(1998년 3월호) 발췌


2015년

창원 진해구의 우도어촌계에서 채취한 피조개는 명품으로 이름이 자자하다.

바다 위에서 피조개 선별작업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바지선(무동력선)에 도착하니 피조개 작업이 이미 시작됐다. 커다란 그물이 바지선으로 올라오고 묶여 있던 줄을 푸는 순간 검은 돌맹이 같은 것들이 굉음을 내며 쏟아졌다. 어시장에서 보던 피조개는 그나마 깨끗이 세척을 했던 상태라 큰 꼬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다밑에서 갓 올라온 피조개의 생김새는 선뜻 손이가긴 어려운 비주얼을 선사했다. 

평평한 바지선 바닥에 넓게 펼쳐진 피조개 더미 위로 세찬 물줄기를 퍼붓는다. 까맣던 피조개의 껍질이 꼬막 특유의 빛을 내기 시작하고 동시에 펄과 물에 젖지 않게 온몸을 무장한 어업인들이 선별작업에 들어갔다. 

쉼없이 피조개를 나르고 있는 어선에 올랐다. 양쪽 옆으로 커다란 형망이 바닷속으로 잠긴다. 그리곤 이리저리 진해만 바닥을 20여 분 정도 긁고 그물을 감아올린다. 배가 휘청일 만큼 형망안에는 피조개가 가득하다. 반대편 형망 또한 같은 방법으로 한가득 피조개를 채운다. 그리곤 다시 바지선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방법으로 패류를 채취하는 것을 형망어법이라 부르는데 주로 수심이 깊은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참꼬막은 같은 고막조개과 이지만 벌교참꼬막은 뻘배를 타고 작업을 하는데 우도에서 나는 피조개는 수심이 6미터 정도인 모래펄에서 자라기 때문에 잡는 방법이 다른 것이다.

바지선에 1차 세척을 끝낸 피조개는 가공될 것들과 날 것으로 바로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것들이 있다. 운반선 한가득 피조개 망태가 실려 있기 때문에 어획량이 많아 보이지만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실제로 90년대 진해만에서 채취된 피조개양이 한때 1/3로 줄어들 만큼 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진해수협과 어촌계의 노력으로 생존율이 높은 종패를 배양하는데 성공했고 2000년대 들어 서서히 생산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큰 시장이었던 일본의 수요 감소와 가격이 낮은 중국산과의 경쟁으로 현 상황이 녹록치 못하다고 한다.

※ 우리바다 524호(2015년 3~4월호) 발췌


피조개 양식 생산량 변화 추이

피조개는 아직까지 대중화된 수산물은 아니다. 90년대 피조개 가격은 현재 가격보다 7~8배 정도 비싼 고급 수산물에 속했다. 따라서 비싼 가격 때문에 저변 확대가 힘들었고 최근에는 식생활문화가 바뀌면서 피조개 가격이 낮아졌음에도 찾는 이들이 많지 않다. 

1997년 피조개 생산량은 1만2422톤으로 이를 금액으로 따지면 565억5420만원 가량이다. 이 피조개를 수출해서 벌어들인 외화가 5200만달러 정도로 당시 어려운 IMF 경제여건을 감안할 때 피조개는 ‘피’같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효자인 셈이다. 

피조개 양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종패 생산량은 지난 1992년 42억 마리에서 1993년 12억 마리로 격감했고 1994년 대풍이 들어 179억 마리나 생산을 했다. 하지만 1995년 생산량 제로로 전국 피조개 어업인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1996년 피조개 생산량은 33억 마리였다.

이러한 생산량을 보이던 피조개는 일본 수출량이 줄어들고 국내 소비 또한 부진해 생산 어촌계에서 주문량을 보고 주문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대량생산으로 인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가장 많은 피조개 생산량을 보이는 진해시수협 최근 5년간 피조개 위판량은 2016년 950톤, 2017년 587톤, 2018년 5697톤, 2019년 2223톤, 2020년 1378톤으로 나타났다. 2016년과 2017년 생산량이 급격하게 감소한 것은 종패를 바다에 뿌리고 다 자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어촌계별로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 기간동안 피조개를 생산하는 어촌계가 줄어들어 생산량이 급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피조개를 일본에 수출하고 있는 패류살포양식수협 자료에 따르면 대일 피조개 수출량은 가공하지 않은 피조개(1개 10㎏망)와 가공된 피조개 각각 2016년 4만8337개, 393톤, 2017년 2만4165개, 432톤, 2018년 3만830개, 414톤, 2019년 2만873개, 338톤, 2020년 2만449개, 292톤 가량으로 나타났다. 

가공 피조개의 경우 생산량의 변화가 급격하게 변하지 않고 있지만 가공하지 않은 피조개 수출량은 절반가량 줄어들었다. 이러한 원인은 최근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이 까다로운 검역 기준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피조개에서 발견되는 패류독소는 내장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가공하지 않은 피조개의 경우 검역을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한다. 반면 가공품의 경우 내장을 제거해 수출되기 때문에 강화된 검역 기준 통과가 수월해 수출 물량 변화가 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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