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어업인 항일 투쟁사
3.1운동과 어업인 항일 투쟁사
  • 김병곤
  • 승인 2019.02.27 17:12
  • 호수 47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병곤
ikimgon@suhyup.co.kr

 

올해는 3.1운동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이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일제의 압박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외쳤던 독립만세 함성 소리가 지금도 우리의 가슴으로 들리는 듯하다. 나라를 빼앗긴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 일인지는 직접 겪지 않은 우리는 학습으로 체험하고 있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려는 선인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도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에 대대적인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다. 친일청산 등 역사바로세우기가 민족정기를 바로 정립하고 정의로운 나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정부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거나 가려졌던 봉분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노력이 계속하고 있다. 일제의 압박은 우리 어업인과 수산업에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
 
때마침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어업인들의 항일 투쟁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와 학술 행사가 잇달아 열린다. 국립해양박물관은 ‘어부들의 대한독립만세’를 특별 전시하고 어업인들의 항일 투쟁사를 학술적으로 짚어보는 세미나도 연속 개최한다 한다. 어업 부문의 일제의 침탈행위와 어업인들의 항일 투쟁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일제는 일찍이 우리 해안에 침입해 우리 어업인보다 우수한 선박과 어구로 많은 어획고를 올렸다. 1883년 조일통상조약을 맺었다. 이를 계기로 거제도와 통영, 여수, 경주 감포, 포항 구룡포에 ‘이주어촌’이라는 사실상의 일본 어업인들이 이주하도록 식민 어촌을 만들었다. 이들은 일본식 집을 짓고 일본식으로 개량한 어선과 어구어법으로 동해와 남해, 제주도 연안에서 마구잡이로 잡은 수산물을  부산, 마산, 구룡포 등지에 설립한 어시장을 통해 자국으로 수탈해갔다.
 
일본 어업인들은 1910년 이후 조선 총독부의 후원 하에 우리 어장을 독점했다. 총독부는 어업령을 공포해 일본 어업인들의 생산을 적극 지원했다. 그리고 우리 어업인의 활동을 억압하고 우리 수산물들을 침탈했다. 따라서 우리 어업인들은 일제에 빼앗긴 어업권의 회복과 수호를 위한 항쟁을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전개했다.

어업인들의 항일투쟁은 ‘제주 해녀 항일항쟁’과 전남 완도 소안도 섬사람들의 일제에 대한 항거가 손꼽힌다.

우리나라 최대 어업인 운동이자 여성운동인 ‘제주 해녀 항일항쟁’ 일제가 설립한 해녀어업조합이 해녀들의 수산물을 헐값에 수탈해가자 해녀들이 1931년 호미와 빗창을 들고 궐기해 1932년까지 이어졌다. 제주해녀 항쟁은 230여 회 집회와 시위, 참여 인원 1만7000여 명이 참여했다고 기록돼 있다.

‘항일의 섬, 독립항쟁의 섬’이라고 불리는 소안도는 일제 강점기에 전국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격렬한 항일운동을 펼쳤다. 정부 건국 훈장을 받은 20명을 포함해 89명의 항일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이밖에도 함경도, 여수, 통영 등지에서도 크고 작은 일제의 저항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국립해양박물관의 이번 기획전은 어업인들과 수산인들의 반일 항쟁을 조명하면서 우리는 100년 뒤 후손들에게 어떤 바다를 전해줄 것인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했다.
 
하지만 어업인들의 항일 운동을 재조조명하는 것도 좋지만 일재의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수산업법과 용어 정리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