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세계사를 뒤흔들 물고기, 대구
서양의 세계사를 뒤흔들 물고기, 대구
  • 수협중앙회
  • 승인 2018.06.21 11:48
  • 호수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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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여행전문기자

나에게 평생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 하나 있다. ‘봄 지나 가을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황당해할 소원이지만 더위에 맥을 못 추는 나에게 여름은 공포와도 같다. 그래서 난 여름보다 겨울의 바다를 더 좋아한다. 겨울 바다가 좋은 이유는 하나가 더 있다. 바로 ‘대구’ 다. 겨울이면 우리네 밥상에 회로, 탕으로, 찜으로 올라오는 대구는 나에게 겨울의 맛을 전하는 귀한 손님이다.

나에게는 그저 맛있고 반가운 겨울 생선, 대구에 대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몇 해 전. 어부 출신 저널리스트 마크 쿨란스키가 쓴 「대구」라는 책을 통해서다. 알고 보니 대구는 유럽사를 뒤흔든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대구는 바다 밑바닥을 입을 벌린 채 떠돌아다니는 물고기다. 근육을 사용할 일이 없어 유독 흰 속살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지방 함량이 적어 저장성이 좋고 담백한 맛으로 상품가치 또한 높다. 이러한 대구에 처음으로 주목한 이들이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중심의 해상민족 바이킹이다.

바이킹이 중세의 유럽을 지배했던 시절, 바이킹족은 남쪽으로는 이탈리아, 동쪽으로는 러시아까지 전 유럽을 정복해 나갔다. 그들이 그토록 먼 거리까지 항해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말린 대구였다. 바이킹 이후 유럽의 생선시장에서 대구는 최고의 강자로 떠올랐다. 15세기, 포르투갈에서 소금에 절여 말린 염장대구가 개발되자 대구의 몸값은 더 치솟았다. 유럽 각국은 앞다퉈 대구를 잡고 가공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대구 잡이 어부들은 더 많은 대구를 독점하기 위해 서쪽으로 더 멀리 멀리 나아갔다. 북대서양 원양어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당시 대구 잡이 일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대구의 이윤은 엄청났고 수요도 끝이 없었다. 사람들은 황금대구의 욕망에 사로잡혔고 당시 약 60%의 대구 잡이 어부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바다의 황금이었던 대구는 전쟁까지 유발했다. 이른바 ‘대구전쟁(The Cod Wars)’이다. 아이슬란드와 영국은 1958년~1975년까지 대구 어업권을 둘러싸고 세 차례의 대구전쟁을 벌였다. 결국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중재에 나섰고, 영국이 아이슬란드가 요구한 200마일 영해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종료됐다. 이후 200마일 영해는 이후 국제해양법의 중요한 기준이 됐다.

바이킹의 대이동이 있었던 8세기부터 1000여년간, 사람들은 대구 떼를 따라 삶의 방식을 달리 했다. 대구를 따라 더 넓은 바다로 나갔고, 신대륙을 만났고, 새로운 문화를 꽃피웠다. 대구와 함께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대구는 인류에게 신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신의 축복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는 일이다. 대구뿐만 아니라 현재 전 세계 수산물의 개체수가 줄고 있다. 신의 축복과 인간의 욕망 앞에 놓인 바다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든다. ‘대구는 가만히 두면 30년까지 산다는데, 1m를 훌쩍 넘긴 대구를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아니 그보다 먼저 바다에서 물고기가 사라지는 날이 정말 올까?’, ‘물고기 없이 사람들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질문이 꼬리를 물며 어이진다. 더불어 두려운 현실이 눈앞에 그려진다. 밥상에서 사라진 물고기, 생명력을 잃은 바다, 사라져가는 어촌과 퇴화하는 인류의 문명… 상상만으로도 오싹해진다. 성큼 다가왔던 여름 더위가 멀어진다.

사람들은 인간이 바다에서 건져 올린 가장 큰 행운을 물고기라 말한다. 하지만 행운이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Seneca)의 말처럼 ‘준비와 기회를 만날 때 일어나는 것’ 아닐까? 지금은 앞선 인간의 욕망을 누르고 바다와 바다생물을 바라보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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