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섬, 石島, 獨島, 그리고 어업인
독섬, 石島, 獨島, 그리고 어업인
  • 김병곤
  • 승인 2017.08.31 14:44
  • 호수 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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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는 그 민족을 담는 그릇이다 했다. 영토가 없는 민족은 국가는 물론 민족으로서의 존재를 이어갈 수 없다. 때문에 생명을 걸고 영토를 지켜야 한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민족이건 그 누구에게도 영토는 생존을 위한 일차적인 자산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오랫동안 그 효용조차도 알 수 없는 독도를 지도에 그려 넣고 소중한 강토로 그리워했다. 하지만 독도는 일본인들의 끊임없는 영유권주장으로 오늘날 위기를 겪고 있다.

독도문제는 일본의 영토침탈이지만 그 핵심에는 어업권 문제가 결부돼 있다. 이는 과거에도 정부가 지켰던 것이 아니라 우리 어업인들이 지켜왔던 것이다.

300여년 전 조선 숙종 때 어부 안용복이 오늘날 울릉도와 독도가 분명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 증거를 밝혀냈다. 안용복은 어부 40명과 울릉도 주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우리 어장을 침범한 일본 어부를 쫓아내다 일본으로 잡혀 가기도 했다.

그는 일본 정부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 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따져 조선 영토임을 확인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1905년 우리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은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로 바꾸고 시네마현에 포함시켜 버렸다.

해방 이후에도 독도를 지키는 사람 역시 어업인이었다. 1953년 울릉도 어민 홍순칠 대장은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고 일본의 독도 침탈에 맞서 독도를 지켰고 독도에 한국령(韓國領)을 새겨 넣기도 했다. 이후 1965년 대구가 고향인 최종덕씨는 독도에 들어가 집을 짓고 조업을 하며 지난 1981년 독도주민 1호로 기록돼 있다.

얼마전 독도가 고흥 말 '독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된다. 최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고흥의 증언 '독섬, 石島, 獨島'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 학술심포지엄에서는 ‘오구라 신페이의 石과 TOK’, ‘문세영 조선어사전의 독, 石, 獨’,  ‘서첩(書帖) - 독섬, 石島, 獨島'’등 독도 관련 주제발표들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독도는 1700년대 말부터 울릉도에 살았던 고흥 사람들이 불렀던 ‘독섬’에서 유래됐으며 고흥말로 ‘돌’을 ‘독’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돌섬’을 ‘독섬’으로 부르고 한문으로 ‘석도’나 ‘독도’로 썼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훈석 우리문화가꾸기회 대표는 “고종 때 검찰사 이규원이 작성한 울릉도 검찰일기에는 주민 140명 가운데 고흥 출신이 94명으로 적혀 있다”며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들 고흥사람들은 어선을 만들기 위해 숲이 울창한 울릉도로 들어갔고 배를 만들어 어업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울릉군의 관할구역에 ‘석도’를 포함한다고 명시했고 여기서 나온 ‘석도’는 독도의 다른 이름이며 이를 부른 사람들은 고흥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독도 지킴이는 어업인들 이었고 그 혼이 살아있음이 다양한 방법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제 우리 영토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그 영토에 대한 역사적 연고를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독도는 우리 조상으로부터 지켜온 민족의 자존심이자 어업인들의 혼이 담겨져 있는 상징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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