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호어명고(蘭湖魚名考)(19)
난호어명고(蘭湖魚名考)(19)
  • 수협중앙회
  • 승인 2017.08.17 15:35
  • 호수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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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탐낸 최고 품질의 우리 ‘전복’

수협중앙회는 수산업의 중요성과 함께 수산관련 지식과 정보를 널리 알리는데 노력해 왔다. 이에 지난 2011년부터 ‘수산 지식 나눔 시리즈’를 발간해 오고 있다. 최근 수산경제연구원이 난호어명고(蘭湖魚名考)의 ‘어명고’ 부분을 완역해 발간했다. 이 책은 자산어보, 우해이어보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어보집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난해한 문장을 현대어로 알기 쉽게 변역하기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완역본에는 원문에 대한 설명과 어류의 생태학적, 논리적 오류를 규명하기 위해 평설이란 제목으로 해설을 달았다. 또 평설에서는 표제어가 된 어류가 현재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지 등을 설명했다. 어명이 밝혀지지 않았던 어종도 기존자료와 중국, 일본 자료와 대조해 가능한 우리 어명을 확인하려 했다. 본지는 완역된 난호어명고를 연재해 우리 수산물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복(鰒)

바다 속의 돌벼랑에서 나며 모양은 타원형이다. 한쪽에만 껍데기가 있는데 밖은 거칠고 검으며 안쪽은 빛이 난다. 등의 측면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7개인 것도 있고 9개인 것도 있다. 다른 한쪽에는 껍데기가 없이 돌에 붙어 있다. 살이 희면서 푸른색을 띠고 있는 것이 수놈이고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이 암놈인데 암놈이 맛이 더 좋다.

물속에 있을 때 살의 반을 껍데기 밖에 내놓는데 움직일 때는 기어가듯 나아간다. 살의 머리와 꼬리에 모두 구멍이 하나 있는데 아랫입술과 윗입술 모양이 같다. 큰 것은 지름이 4~5치이고 아주 큰 것은 간혹 1자 가까이 자란다.

동해와 남해 그리고 서해에 모두 있다. 관동의 고성등지에서 나는 것은 껍데기가 작고 살이 말랐으며 영남의 울산·동래, 호남의 강진·제주 등지에서 나는 것은 껍데기가 크고 살이 쪄 있다. 어부들이 잡으면 혹간 살 속에서 진주를 얻는다. 둥근 모양이 고르고 광채가 나서 품질이 대합조개의 진주보다 상품이지만 얻기가 쉽지 않다. 살에서 껍데기를 벗겨내지 않고 얼음에 채워 파는 것을 속칭 생복이라고 하는데 횟감의 진품이 된다. 껍데기를 벗겨내고 햇볕에 말려서 10마리씩 대꼬챙이에 꿴 것을 건복이라고 하는 데 반쯤 건조시킨 것이 더욱 맛있다. 얇게 다져서 펴고 종잇장처럼 펴낸 것을 추복, 또는 장복이라고 하는데 모두 안줏감으로 좋은 물건이다.

중국인은 복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기』에 “왕망이 복을 먹었다”라고 했으니 이는 그가 특이한 음식을 즐긴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본초에 관한 책에는 전복은 없고 석결명이 있는데 주석가들 중에 어떤 사람은 복과 석결명은 서로 비슷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의 종류이면서 2개의 종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초』에서 묘사한 석결명은 지금의 복 껍데기와 흡사하니 한 가지 사물이다.


평설

전복은 원시복족목 전복과에 딸린 연체동물의 총칭이다. 수심이 5~50m 되는 바다의 암초에 서식한다. 전복은 옛날부터 식용해 온 주요 수산물로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전복류에는 참전복과 까막 전복, 말 전복, 오분자기, 둥근 전복 등 10여종이 있다.

전복은 예로부터 구이와 죽, 회로 먹는 영양식의 하나였고 우리나라 것이 질이 좋았다. 조선시대에도 일본인들이 우리바다에 와서 몰래 채취해 갔을 정도로 전복은 미식의 하나였고 근대여명기인 1892년에는 전남 완도에서 통조림이 처음 제작돼 수산물 가공의 효시가 된 식재료이기도 하다.

어명고에 왕망이 전복을 먹었다고 하며 그가 특이한 음식을 즐긴 것을 기록한 것이라 했다. 왕망은 한(漢)나라의 왕권을 빼앗고 신(新)왕조를 건국한 사람이다. 중국 황실에서는『예기』에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은 먹지 않았다. 중국에서 먼 곳인 우리 바다에서 많이 나오는 전복은 『예기』에는 기록되지 않은 식품인 것이다. 그런데도 왕망이 전복을 즐겨 먹자 이를 특별히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복이 해안 46개 지역의 특산물로 기록돼 있다. 『여지승람』의 기록은 그 지역에서 전복이 많이 난다는 것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공물과 진상품으로 지정돼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선한 전복을 바다에서 잡아 한양으로 수송하기는 어려웠다. 진상물이 상해 보낸 관리들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전복 진상이 철폐된 것은 조선 고종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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