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호 선장 강원고성군 거진, 납북 어업인 가족
김장호 선장 강원고성군 거진, 납북 어업인 가족
  • 이명수
  • 승인 2010.01.05 19:55
  • 호수 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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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선장

힘든 납북자 가족의 삶 희망으로 승화
사회적 질시속 오징어어선 선장으로 우뚝

▲ 1년중 8개월여를 바다에서 지내면서 그래도 납북자 가족의 고통을 감내하고 희망을 잃지않고 살아가고 있다. 웃음으로 포즈를 취해준 김장호씨

“그 충격으로 아버님과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둘째 형님 마저 자살했습니다. 가정이 풍비박산났습니다.”

납북 어업인 가족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가슴아팠고 지금도 가슴 한켠에 두고 있다는 김장호씨(50). 납북사연을 이같이 소회하면서 평생 한이 될 것이라며 가슴아픈 기억에 눈시울을 붉혔다.

김장호씨의 슬픈 가족사는 지난 65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6세 중학생이었던 형 김장원씨가 승선체험 삼아 배에 올랐던 것이 화근이 됐다.

납북순간 남북간 총격전이 벌어지는 등 전쟁터를 방불케 했지만 결국 형의 배는 북측으로 끌려갔다.

이후 3대독자였던 아버지는 생업을 접고 아들을 찾으러 바다를 방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으로 납치된 아들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이 때 충격으로 아버지는 1969년 돌아가셨다. 생계를 책임졌던 어머니도 굴곡의 삶의 살다가 1991년 세상을 떠났고 이어 형님마저 자살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하루아침에 김장호씨 가족은 죽음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현재 누나와 김장호씨만이 살아있다. 또 형 김장원씨는 1980년 귀환한 납북어업인을 통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 유일한 가족사진을 품속에 지니고 있다, 사진 왼쪽이 납북된 형 김장원씨. 김장호씨는 출생전

김장호씨의 삶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자신도 중학생때부터 배를 탔지만 27세때 본격적으로 배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납북자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시 연좌제 등 사회적 질타속에 방황하기 일쑤였다.

“안해본 것 없습니다. 취업이 되지 않아 닥치는 대로 살았지만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나마 웃을 수 있지만 젊었을 때 방황은 끝이 없었다는 김장호씨다.

김장호씨는 다행히 지금 강원 고성군 수협 최영희 조합장의 도움으로 선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됐다.

숱한 고생끝에 4년전 27톤급 오징어어선 ‘해왕호’를 구입, 당당히 선장이 돼 비교적 안정적인 어업활동을 하게 됐다.

김장호씨는 1년에 약 8개월을 바다에서 생활하고 있다. 부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생업을 위해서는 할 수 없다면서 멋쩍어 했다.

기자가 어렵게 만나 곳도 마침 자신의 고향 강원 거진이 아닌 경북 경주 감포항에서다. 3일간의 전화끝에 그것도 선상 전화로 통화를 해가면서다. 인터뷰는 지난 12월 27일 아침 배를 입항시킨 뒤 오징어를 하역하고 기름을 다시 채워넣는 사이 ‘해왕호’선상에서 이뤄졌다.

▲ 해왕호 운전모습


자국민 보호하는 국가 인식 전환 절실
“올 전업경영인자금 수혜 마지막 나이”

김장호씨는 “자신뿐만아니라 모든 납북자 가족의 삶은 삶이 아니다”라면서 “정부가 진정으로 납북자 가족을 지원하려면 몇천만원(최근 정부가 납북자 가구당 3000만원을 보상금조로 지원)의 보상금이 아니라 지원법을 마련해 지속적이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국가를 위해 가족을 위해 살아온 죄 밖에 없는데 납북자 가족이라고 질시받는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하소연했다. 장호씨는 “북한에 쌀과 비료를 지원하면서 오히려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는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김장호씨는 낮 12시께 출항하면 다음날 새벽께 입항하는 삶을 산다. 그래서 벌어들이는 1년 조수입은 약 8000만원. 정부 융자금, 은행·사채이자 등 빌린 돈을 갚고 나면 2000만원을 쥘까 말까다. 아무런 도움없이 철저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견디는데는 자신있다는 장호씨는 총허용어획량(TAC) 제도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자원보호차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TAC 제도가 참여하는 모든 어업인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지 않고있다고 지적했다. TAC 자금을 담보력 있고 재력있는 어업인에게 지원하는 현 제도는 모순이며 잘못 시행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과정에서 수협중앙회가 단지 TAC 자금 지원 창구라는 수동적 자세를 탈피해 보다 적극적으로 어업인에게 혜택이 갈 수 있는 제도개선에 나서 줄 것을 요망했다.

2010년 그래도 희망은 갖고 살아가자는 취지에서 희망메시지를 던져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우리 모든 어업인 여러분들, 어려움과 현실을 즐기면서 살아 가자. 새해에는 절망보다 갈수록 좋아 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살아 가자”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올해 저리의 전업경영인자금을 꼭 받고 싶단다. 납북자 가족으로 취업도 안되고 수산업경영인(어업인후계자) 자격도 얻지 못해 지금까지 자금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전업 어업인을 위한 전업경영인자금을 지원받아 올해 안정적인 어업경영에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50세까지만 지원되는 이 자금은 올해 50세인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마지막 혜택이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납북자 가족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제 당당한 어업인으로 국가경제 일조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일한다는 김장호씨의 새해 소망이다.

김장호씨는 수협중앙회가 지난해 10월 13~14일 납북자가족을 초청해 위로행사를 가진데 대해 “납북자 가족을 직접 환영하고 위로해 준 이종구 회장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이같은 정성이 이어져 납북자 가족들이 웃으면서 살 수 있는 날이 조속히 오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 김장호씨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 "해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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