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업in수산’ 창간 비화(秘話)
‘어업in수산’ 창간 비화(秘話)
  • 김병곤
  • 승인 2017.04.06 14:19
  • 호수 3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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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in수산’이 4월 1일로 창간 8주년을 맞았다. 올해도 수협창립일과 수산인의 날이 맞물려 ‘어업in수산’은 조촐한 기념식조차 못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 8년전 ‘어업in수산’의 창간당시가 반추된다.

2008년 7월 어느 여름날 지금은 고인이 된 수협중앙회 모 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신문사 설립과 관련해 상의할 일이 있는 것이었다. 수협에서 수산전문지를 만들려 한다며 기존신문사를 통합하는 것과 새로 만드는 것 어느 것이 좋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두말하지 않고 새롭게 신문을 창간하자고 대답했다. 당시 필자는 ‘새어민경제신문’을 8년동안 발행하고 있었고 수산전문지에서 잔뼈가 굵었기에 수산전문지의 실정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산전문 기자들의 세대교체가 요구되고 있었기에 경영난에 허덕이지 않기 위해서는 자본이 뒷받침된 수협을 중심으로 수산전문지의 재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 길로 새로운 신문 창간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과감하게 신문사를 정리했다. 이미 수협에서는 TF팀을 구성하고 그해 8월 수협중앙회 이사회 의결을 걸쳐 법인설립등기를 마치고 11월 (주)한국어업인신문사의 사업자등록을 마쳤다. 사장 선임을 위해 공모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복병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해 10월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이 신문사 설립을 반대하고 나섰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조직에 신문사 설립은 안 된다”는 궁색한 이유였다. 소위 국정을 논하는 국회의원들이 출자금 4억원 규모의 자회사 설립을 반대했던 것이다. 덩달아 당시 해양수산부는 몇몇 비상식적인 생각을 가진 국회의원들의 반대를 핑계로 수협중앙회에 기관 경고를 내렸다. 이후 신문사 설립은 무산됐다. 이로부터 6개월이 지난 2009년 4월 1일 ‘어업in수산’은 독립된 신문이 아니라 수협 소식지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다. 필자 역시 7개월여의 허송생활을 보내다 소식지를 만들기 위해 합류했다. 3월 11일부터 창간 작업에 돌입하며 ‘어업in수산’이라는 제호를 만들었다. 동시에 신문사 설립에 반대한 정치권에 어필하기 위해 당위성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수협이 1963년 11월 30일 창간한 ‘수협소식’ 이라는 신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실체 찾기에 나섰다. 백방으로 수소문 하던 중 당시 ‘수협소식’을 탄생시킨 김윤덕 대 선배님을 만날 수 있었고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던 신문들을 흔쾌히 수협에 기증해 주었다. 따라서 ‘어업in수산’은 수산전문지의 효시인 ‘수협소식’의 역사적 맥을 잇게 된 것이다. ‘수협소식’ 창간호에는 ‘협동만이 잘 살 수 있는 길인바 의욕과 노력으로 세계 수산국 대열에 앞서라’는 요지의 당시 국가재건 최고의장의 특별담화가 담겨있다. ‘수협소식’이 어업인의 공기(公器)로서 이기(利器)가 되도록 가꾸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탄생됐다는 것을 ‘수협소식’에서 기록하고 있다.

‘수협소식’의 내용은 수산계 소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를 뛰어넘어 정부와 어업인들간의 가교역할을 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또 ‘수협소식’은 수협의 소식만을 담아내는 단순한 사보개념이 아닌 신문대판 크기 4면으로 지금의 수산전문지와 같이 수산 전반의 내용을 담았다. 같은 시기에 창간했던 농협 농민신문의 전신인 ‘농협소식’이 타블로이드판이었음을 감안하면 수협의 소식지는 내용, 판형 등을 볼 때 분명한 신문의 역할을 했다.  ‘어업in수산’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함께하며 창간됐다. 그동안 8년동안 나름 수산계의 대변자임을 자임하고 충실해왔다. 하지만 소식지와 신문의 중간에서 애매성을 지적받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미흡한 점도 많다.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독자여러분들의 보다 많은 관심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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