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焚香 ‘98금양호’] 그 적막함에 슬펐다
[焚香 ‘98금양호’] 그 적막함에 슬펐다
  • 정정길
  • 승인 2010.05.06 21:01
  • 호수 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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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분향소를 다녀와서

정정길/시인

우리는 국가의 부름에 충성을 했으면 했지 아부는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죽어야 할 의무는 졌지만 죽어야 할 장소를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 이것이 더 원통하고, 애절하고 견디기 힘든 안타까움이다.

인천 시내에서도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분향소가 있었다. 대중 교통수단은 없었다. 물어도 모른다고들 한다. 택시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계산 전철역에서 택시를 탔다. 교통의 흐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택시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왕복을 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해관계도 없는 일반 국민이 누가 찾아 와서 조문을 해주겠는가. 거기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국내외적으로 큼직한 이슈가 서너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보도와는 달리 조문행렬이 줄을 있지 않고 있었다.

어째든 국민의 한사람으로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추모하고자 조문 차 찾아 갔을 때는 한산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장례예식장은 큰 도로변에 있어 찾기는 쉬웠다. 들어서보니 주차장엔 차들이 꽉 차 있어 제법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인 감상이라는 것을 이내 알았다. 수협장이라 직원들만 분주하였다. 주차장에서 건물을 올려다보니 현수막이 네 개가 걸려있다.

“우리 어업인과 수협인은 금양호 선원들의 값진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금양호 선원들의 명복을 빕니다.” “대한민국은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금양호 선원들의 명복을 빕니다.” 라고.

현관 입구에는 수협 임직원 여러분들이 안팎으로 서서 뜨문뜨문 오시는 조문객들을 맞고 있을 뿐, 무척 쓸쓸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장례예식장 주변도 한산한 시골 풍경이라 흐린 날씨와 더불어 아주 을씨년스러웠다.

그나마도 오전 중에 국무총리가 다녀가고, 그 하루 전인 2일에는 해군참모총장이 조문을 했다고 누가 귀띔 하는 것을 들었다.

들어서자마자, 입관식이 거의 마쳐가는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울음바다다.

내 아버지, 내 아들, 내 오빠, 내 동생, 내 남편이, 실종되어 어디에 시신이 있는지도 모르고 치러야 하는 입관절차다. 그 심정을 누가 뭘 안다고 위로 말이라고 건네 보낼 수 있단 말인가.

2층으로 올라갔다. 거기는 이와 다른 일반인의 초상집이다. 합동분향소는 3층이다. 입구에는 각 정당에서 보낸 체면치례의 조화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보는 순간 뭔가 모르지만 울컥한 심정이 치밀어 오른다. 
그렇다. 여기는 분향소다. 어느 여승이 홀로 앉아 극락왕생을 빌고 있었다. 

국화꽃 한 송이를 들었다. 영정 속에는 생전의 모습들이 꽃에 싸여 있다. 그 앞에 보국포장이 놓여있다. 이 포장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살아 있다면 한 그물이라도 더 쳐서 가난은 하지만, 가족과 기쁨을 나누는 즐거움만 하겠는가. 오, 애재라. 

그래서 뭐 다른 보상이라도 있느냐고, 지나가는 말로 슬쩍 물어보았더니 천안함에서 거둔 성금 중 일부를 줄 모양이라는 것이다. 공식적인 확인은 아니다. 그렇지. 동냥이라도 해서 준다고 해도 받아야 할 판이다. 이나마도 안 준다면 어디 가서 호소하랴.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정부여, 이들이 나라에 충성을 했으면 했지 절대로 아부는 하지 않았다는 이 사실만은 구구절절이 알아주시고, 빠른 시일 내에 선체뿐만 아니라, 시신도 찾아서 유족들의 품에 안겨주실 것을 주문함과 동시에 이들이 요구한 사항들이 하루 속히 추진되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헌신한 행적이 국민적 귀감의 표징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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