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48주년 수협 성장사
창립48주년 수협 성장사
  • 김병곤
  • 승인 2010.03.31 23:58
  • 호수 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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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을 통해 어업인의 협동조직으로 거듭날 것

정부 주도의 태생적 한계와 어려움 극복하고 꾸준히 발전

‘민주적 협동조직을 통한 복지 어촌건설’을 표방하며 어업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과 수산업 생산력증진과 어가 소득증대를 위해 묵묵하게 걸어온 수협이 48년의 성상을 쌓아 올렸다. 하지만 수산현장을 지키는 어업인들의 대표기관을 자임해온 수협의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다. 흔히들 협동조합이 뿌리를 찾을 때 협동의 기초가 되는 계, 두레, 품앗이 등을 말한다. 하지만 근대적 협동조합의 설립은 태생의 한계를 말한다. 정부주도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수협의 성장 사를 정리한다. 

일제 강점기
한일 합방후 일제는 수산부문의 식민지 수탈을 위해 1911년 어업령을 공포해 일정한 지역내에 거주하는 어업자나 수산물 제조와 판매업자는 조선총복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따라서 어업조합은 어업인들의 노동력과 효과적인 수산물 수탈을 위해 일제의 지원을 받아 1912년 어업조합이 최초로 설립됐다. 1930년 어업조합의 도연합회가 경북에서 조직되고, 1937년 연합회를 회원으로 하는 조선어업중앙회가 발족됐다. 1941년 말에는 2백6개 조합에 15만6천명의 조합원을 거느릴 정도로 성장했다.

수산조합은 전 도(道)를 구역으로 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의 어업자를 조합원으로 조직돼 주로 일본인 어업자를 보호 육성해 어업자본화와 기업화를 도모했으며 어장독점화를 추진해 주던 수산단체였다. 또한 일제는 1923년에 조선수산회령을 공포, 수산행정보조기관의 성격을 지닌 수산회를 설립하고 이들을 회원으로 하는 도수산회, 조선수산회를 조직했다.

일제는 다시 1944년 2월에 수산단체 통합요강을 발표하고 수산관련 단체를 흡수 통합해 계통조직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기존 수산관련단체는 모두 해산되고 12개도의 어업조합연합회와 18개의 각종 수산조합을 회원으로 4월에 사단법인 조선수산업회가 설립됐다. 해방 이후에도 어민들을 포용하고 있던 각종 수산단체는 여전히 감투싸움에만 몰두해 조합원을 위한 조합이 아니라 조합원을 착취하는 기관이라는 인식이 일반 어민들로부터 팽배해 왔다. 이러한 상태에서 1945년 ‘어업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공포되어 기존의 조선수산회가 한국수산회로 개칭되고, 1952년에 또 다시 대한수산중앙회로 개칭됐다.

60년대 개발기
62년 1월 수산업협동조합법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의결돼 수산업협동조합이 탄생하게 된다. 1962년 3월 24일에는 농림부장관 명의로 ‘수산업협동조합 설립에 대한 운영지침’을 전국 수산단체에 시달하여 구(舊) 수산단체를 수산업협동조합 체제로 정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적용한 수산업협동조합법의 부칙 제3조는 “기존의 어업조합, 수산조합 및 대한수산중앙회는 본법에 의한 어업협동조합, 수산제조업협동조합,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로 본다”고 규정해 기존의 수산단체를 그대로 인정한 채 수협을 설립하게 되었다.

1962년 4월 1일에 설립된 수산업협동조합은 88개의 지구별 조합, 12개 업종별조합, 2개 제조업조합 등 모두 102개의 회원조합과 중앙회로 출범했다. 6개 도에 존재하던 도단위 어업조합연합회는 일제히 해산되고 그 권리와 의무를 수협중앙회가 인수했으며, 지구별 조합의 하부조직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자연부락 단위의 어촌계를 조직했다.

수협은 조직과정에서부터 관이 중심이 되면서 중앙집권적이고 하향적인 조직체계로 출발했다. 일제시대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출범한 것이다. 초창기의 수협사업은 위판장의 설치, 각종 수산자금의 취급, 유류직배사업의 개시 등 사업기반의 확립과정을 거쳐 1967년부터 각종 수산개발사업의 적극적인 추진과 원활한 사업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대일 청구권자금의 수산업부문 투입으로 더욱 활기를 띠게 돼 그 결과 각종 어업시설의 확보와 어선의 대형화가 이루어져 196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진 수산경제의 기록적인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1972년 이루어진 조합 정비작업은 당시 126개의 회원조합중 경영이 부실한 조합을 행정구역 또는 경제권 중심으로 통폐합해 88개 조합으로 개편했다.

70년대 성장기
수협 창립으로부터 1972년에 이르는 10년동안 우리나라의 국민경제는 2차에 걸친 경제개발 계획의 성과로 연평균 8%의 경이적인 성장률을 나타냈으며, 수산경제는 국민경제보다 높은 연평균 11.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러한 경제성장과 70년대 초기에 일어난 제반 경제여건의 변화로 수협은 어촌 새마을 운동의 추진과 어업경영안정을 위한 사업활동의 전개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특히 70년대 초 정부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의 이념과 소득증대, 환경개선, 정신계발 등의 추진목표가 수협운동과 동질성을 갖고 있음에 착안, 수협은 새마을운동의 추진을 기본운영목표로 삼고 그 당시 1,500개의 어촌계 조직력과 어촌계원의 협동을 바탕으로 하여 어촌 새마을운동을 효율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그 결과 어촌 새마을운동을 통한 어촌소득증대와 어촌환경 개선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기초조직인 어촌계의 육성발전과 함께 수협운동의 성숙기를 맞게 되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한편 1973년부터 몰아닥친 세계적인 유류파동으로 수산업부문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되자, 수협은 운영목표를 수산업 발전에서 어업경영안정을 위한 활동으로 전환시켜 영어자금과 각종 어업생산자재의 원활한 공급과 생산어민의 어가안정 및 소득증대를 위한 수산물가격 자지사업 및 무역사업 등을 전개하는 한편, 전국 주요소비도시에 내륙지 공판장을 설치하는 등 다각적인 사업을 꾸준히 전개하여 석유파동의 위기를 무사히 극복해 나갔다. 수협은 1979년 3월 1일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협동조합연맹(ICA) 집행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정회원에 가입돼 국제적으로도 협동조합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80년대 안정기
80년대 성년기를 맞게 된 수협은 어업인의 소득증대와 복지향상을 위한 각종 사업을 강력히 추진해 어업인의 어업경영 및 생활전반을 지원하는 종합 협동조직체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80년대 초부터 일부 연안어장의 어획부진과 연근해 어장의 해양오염에 의한 양식수산물의 피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연근해 어업인을 돕기 위해 수협은 다각적이고 적극적인 지원대책을 강구 이를 연차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수협은 또 83년 9월 1일 업무개선위원회를 설치 협동조합의 활성화를 위한 새 수협운동을 적극 추진했다.

한편 ICA의 정회원으로 가입한 수협은 세계 각국의 협동운동과 활발한 교류가 시작돼 ICA 총회를 비롯한 ICA 중앙위원회 및 수산위원회 등 각종회의에 참가해 1988년 7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ICA 수산위원회에서는 수협이 부의장국으로 피선되어 국제적인 지위향상과 수협운동의 국제화를 이루게 됐다. 80년대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수협은 사업규모를 확대하면서 사업경영에 내실화를 기해 어업인의 권익보호와 복지어촌건설의 당면 목표를 알차게 추진, 신뢰받는‘봉사수협상’정립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 수협 대약진운동 3조원 자체자금조성결의대회 모습(90년 12월)

90년대 중흥기
90년대의 수협은 민주수협의 새로운 도약을 모색해 왔다. 수협은 그동안 조직정비를 꾸준히 단행하여 중앙회(본부, 9개지회)와 87개 회원조합 및 1,780개에 달하는 어촌계로 조직, 대어업인 봉사체제를 구축했다.

이와 같은 발전과 변화 속에서 민주화와 자율화 시대를 맞은 수협은 88년 12월 31일 개정된 새 수협법에 의해 조합장 직선제를 실시했으며, 중앙회장도 민선 조합장의 손으로 90년도에 직접 선출함으로써 민주수협의 새 장을 열었다.

수협은 자립경영기반 확립을 위해 90년 12월 4일 ‘3조원 자체자금 조성운동’추진결의대회를 개최하고 91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이 운동을 추진, 당초목표보다 1년 앞당겨 92년 달성하여 93년부터는 제 2단계 수협대약진운동을 전개 90년부터 사업에 있어서 질적, 양적인 면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영어자금 공급에 있어서도 95년부터 매년 1천억원씩 증액하여 98년에 수협사상 처음으로 1조원(1조8백억원)이 넘는 규모로 자금공급을 했다.

또 지상 17층 지하 5층 규모의 현 신천동 사옥에는 93년에 이주하였다.

95년 11월부터 경영쇄신방안으로 경제, 신용사업별로 생존전략을 수립하여 96년부터 98년까지 3년 동안 ‘10조원 자체자금조성운동’과 ‘화합과 창조의 공동체문화’를 창달하고자 ‘수협새물결운동’을 전개하여 10조 9,488억원의 자체자금을 조성했다.

하지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IMF체제는 수협도 예외일 수 없어 98년부터 몰아친 구조조정과 금융환경변화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수협은 90년대를 마감하게 된다.

▲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 현판식(2010년 2월 26일)

2000년대 시련과 재도약
새 천년 들어 수협은 창립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변화와 변혁의 시기를 맞고 있다.

IMF 이후, 수협은 강화된 금융재무기준으로 대표되는 금융산업의 급속한 환경변화에 따른 경영악화로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과감한 개혁과 변화를 지속하고 있다. 2001년 한해 수협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2차에 걸쳐 총 11,581억원이었다.

이로 인해 신용사업은 정부와 MOU를 체결하는 불운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2001년 ‘뉴스타트180운동’을 시작으로 2009년 ‘win-start 2009’운동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꾸준히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상호금융사업도 꾸준히 성장해 2009년 역사적인 예금 12조원, 대출금 8조원을 동시 달성하는 실적을 올렸다. 공제보험사업도 매년 경영혁신을 통해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오고 있다.

수협공제보험사업도 임직원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 결과 공제료 실적에서 2008년 3,820억원보다 무려 55%나 늘어난 5,923억원의 기록적인 성장을 달성했다. 이는 2005년도와 비교하면 그 규모면에서 2.5배나 증가한 수치다.

수협은 또 2002년 1월말 노량진수산시장을 인수하여 수산물 유통개혁에 한걸음 더 나갈 수 있게 됐다.
노량진시장 인수로 수협은 생산자인 어업인과 소비자인 국민을 위해 노량진시장이 갖고 있는 수도권 수산물의 수급기능과 가격안정 기능을 적절히 조화시켜 안정적인 수산물 수급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또 지난해에 도시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어업인의 교육, 문화, 복지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어업인 교육문화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출연기금 17억원으로 설립됐으며 해양이용 공공기관 및 민간기업의 기금출연을 유도하고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홍보·기부권유를 통해 기부금 모금을 적극 추진, 2014년까지 500억원을 확보하여 이를 재원으로 어업인 교육사업, 어촌문화사업, 어업인 복지사업, 조사연구 등을 주요사업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지난해 이종구회장이 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서 차기 수산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오는 2013년까지 위원장직을 수행하며 같은 기간 수협중앙회는 ICA 수산위원회 사무국 운영을 담당하게 된다. 이로써 수협은 국제적으로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오늘로 창립 48주년을 맞는 수협은 끊임없는 자기혁신과 변혁을 통해 효율성과 전문성을 갖춘 명실상부한 어업인의 협동조직으로서 거듭날 것이며 21세기 신 해양시대에 걸맞게 수산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국민경제에도 새로운 역할을 다하는 본연의 임무와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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